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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나의 삶은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에 와있다. 전환점에 와있다는 것은 사실 그만큼 고달프다는 것이다. 삶에는 음양이 있다. 살다보면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리고 풍요로운 때가 있는 반면 모든 일이 잘 성사되지 않는 암울한 시절이 있다. 하지만 이 음양은 서로 함께 보완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어느 하나 지나치게 부정하거나 긍정할 필요가 없다.

 나의 경우를 보자면 지난 8년 동안 준비해온 일이 잘 되지 않았다. 아니, 잘 되지 않았다기 보다는 그 일이 수명을 다한 것이다. 나름 사회초년생으로써 꽤나 시간과 열정을 쏟은 일이었다. 하지만 사회가 잘 알아주는 일은 아니었다. 허나 이 일이 잘 안 풀리고 있는 것은 또 미래의 나에게 있어 안 좋기만 한 일일까? 오히려 이 일이 안 풀린 것을 원동력삼아 또 새로운 일을 도모하여 더욱 잘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현재는 내년을 염두해도고 많은 일들을 도모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굉장히 열심히 살고 있지만 당장 손에 잡히는 수익은 굉장히 적다. 내 또래의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조바심도 들고, 괜한 열등감도 생긴다. 하지만 마치 개구리가 뛰기 위해 다리를 웅크리듯 이런 시간을 견디지 않으면 높히 뛸 수 없음을 알기에 이 시간을 인내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시간이 있어 훗날 빛나는 삶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노력들이 결실을 맺어 세상에 나를 마음껏 알리고 많은 돈을 벌게 되면 그 삶은 행복하기만할까? 아마도 수많은 사람들 간의 관계에 신경쓰느라 눈치를 보고, 사회적 명예에 걸맞는 행동과 수준을 갖추느라 애쓰고, 모인 돈에 집착하며 항상 불안할 것이다. 이것이 성공한 사람들의 모습 뒤에 감춰진 음이다. 성공하였다고 해서 행복만 있는 것이 아니다. 비록 지금 성공하지 않았다고 우울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꿈도 기대도 많은 지금이 마음만은 행복할 수 있는 것이고, 또 가진 것이 없기에 홀가분할 수 있는 것이다.

 명상수련에서도 삶에서도 매 순간에 대해 분별심을 낼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은 음양의 관계가 있기 때문에 불행 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것이고, 행복 속에서 불행을 근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분별심이 아닌 평정심이 중요한 것이다. 수련도삶도 평정심을 지닐 수 있을 때 비로소 큰 성취를 할 수 있는 것이다. 평정심 자체가 어쩌면 수련을 통해 얻어낼 삶의 가장 큰 지혜인 것이다.


  여기 세상사가 너무 힘이 들고 머리가 복잡한 한 남자가 있다. 그에게는 주말마다 마치 하나의 의식처럼 하는 일이 있다. 주말이면 무거운 마음과 복잡한 머리를 조금은 내려놓고 등산복을 챙겨 입는다. 매번 이 등산복과 이젠 내 발에 착 달라붙어 길이 들은 등산화를 신으면 벌써 마음이 편하다. 평소 출근을 할 때면 왜 이렇게 차에 시동을 켜기도싫건만, 일요일 아침 만큼은 차에 시동켜지는 소리가 참 좋다. 편의점에 잠시 들러 삼각김밥과 캔커피를 사들고 홀가분하게 매번 오르는 산에 또 오른다.

 이 남자는 어쩌면 이 순간큼은  주말예배를 드리는 기독교인만큼, 매번 산에 돌을 이고 나르는 시지포스만큼 성스럽다. 인류의 온갓 죄를 마음에 이고 등산을 하며 원죄를 씻어내린다. 등산은 그에게 종교 같이 성스러운 의식이다.

 ... 위의 글을 보라. 우리네 동네 아저씨들의 대다수가 하고 있는 주말등산이 새롭게 보이지 않는가! 등산을 지나치게 예찬한 과장이라고? 절대 그렇지 않다. 위의 글은 매번 등산을 즐겨 하시는 우리 아버지를 보고 느낀 것을 가감없이 그대로 글로 적어본 것이다.

 나는 명상을 한다며 몇십만원을 호가하는 비싸고 예뻐보이는 명상도구를 산다던가, 명상강좌를 듣기위해 발품을 팔고 기꺼히 돈을 지불한다. 물론 이런 행위들을 통해 일종의 '구조화된' 명상의 시스템과 방법론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고, 명상과 관련된 다양한 사람들과 사회적인 네트워크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실속있게 따져보면 주말마다 등산을 하시는 아저씨들과 나를 비교했을 때 누가 더 명상의 고수인지.. 나는 자신있게 나라고 감히 말할 수 없다.



 명상에 대한 온갓 이론과 군더더기를 제거하면 명상이란 그저 '몰입의 즐거움'이다. 나의 호흡, 몸의 감각, 특정한 대상이나 행위에 집중하는 것. 그것이 바로 명상이다. 명상의 개념은 절대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저 '집중이 이어진 상태'가 명상이다.(파탄질리 요가수트라의 말을 그대로 따온 것이다.)

 하지만 이 '집중이 이어진 상태' 즉 몰입을 하는 것이 절대 쉬운 것이 아니다. 당신은 의도적으로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것이 얼마나 이어질  수 있는가! 아마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시도해본 사람들은 자신이 성인 ADHD가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하게 될 것이다. 그만큼 몰입은 어렵다.

 하지만 몰입이란 것이 막상 매우 쉽고 자연스러운 때도 있다. 일단 너무 재미있어 미치겠는 일을 만났을 때이다. 그것이 일이든 놀이이든 취미이든 혹은 사랑이나 성관계이든 우리는 정말 좋아 미치겠는 일을 할 때 엄청난 집중력을 보인다. 기실 이 때의 상태는 의도적인 명상의 상태보다 훨씬 강력한 에너지를 지닌다. 물론 이 강렬한 불꽃이 사그라들때 나의 정신이 피폐해지고, 육체가 망가진다면 이를 명상이라 정의내리기는 힘들 것이다. 명상은 그것을 실행한 후 사람을 더 맑고, 에너지 넘치게 해주어야 한다.

 또 하난 엄청난 몰입을 할 때는 세상사에 엄청난 고통을 겪은 후, 아주 단순한 행위에 몰입할 때이다. 이 세상의 아버님들이 주말마다 하는 등산이 이를 대표한다. 우리는 세상사를 살며 엄청난 고통을 감내한다. 자신컨데 산사의 수도승보다 더 고행을 감내한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삶에서 아주 큰 충격적인 일을 겪은 후 미친듯이 하염없이 그저 걸어본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기실 티벳사람들의 오체투지 순례와 크게 다르지 않은 메커니즘이 작용한다. 아주 단순한 행위의 반복을 통해 나의 에고의식을 잠재우는 것이다. 이는 절박하게 살기 위한 몸부림이다. 나의 에고의식을 잠재우지 않으면 죽어버릴 것 같기에, 어떻게 해서라도 이를 잠재우고 현재의 행위에 집중하도록 하는 일종의 생존을 갈망하는 생명현상이다.

 꼭 호흡에 집중해야 명상이 아니다. 악기를 연주하거나, 공예를 하거나, 몸을 단련하거나, 걷거나, 등산을 하는 등 모든 행위는 명상이 될 수 있다. 이 모든 행위에서 몰입의 즐거움을 찾고 나의 에고의식을 잠재우며, 이 행위 후에 삶을 활력있게 살아갈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면 모든 행위는 명상이 될 수 있다.

 명상의 정의는 행위에 있지 않다. 명상은 상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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