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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가끔 이럴때가 있다. 뒤집혀서 허우적 거리고 있는 풍뎅이나 창틈과 같이 고립된 공간에 갇힌 날벌레들이 보기 안타까워 풀어주려고하면 이 녀석들이 자기를 헤치려는줄 알고 더 발버둥을 치곤 하는 순간 말이다. 그리고 이런 순간에는 가끔 삶의 어느순간에서 고난에 처해 발버퉁치는 내 모습이 오버랩된다.

 벌레에게 자신을 구해주려는 인간의 의도는 감지할 수 없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삶의 고난에서 자신을 구원해주려는 신의 손길을 감지할 수 없다. 그렇다보니 신의 손길을 더 큰 고난이 덥치려는줄 알고 더 물어뜯고 저주한다. 신의 구원이나 행운은 우리에게 마치 거친 손길처럼 고난의 껍질을 쓴 채 찾아올 수도 있는 것이다.

 삶에서 처한 고난이 훗날 생각해보면 큰 행운인 경우가 꽤 많다. 위기는 기회라고, 지나고보면 그 위기의 순간이 인생 최고의 기회였던 것이다. 또한 세옹지마라하지 않았던가. 행운과 불행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찾아오는 것이지 일방적인 행운도 불행도 없다.

 그래서 인간은 고난의 순간에 처해서도 평상심을 유지하고 자신을 지키며, 맑고 또렷한 정신을 지켜야하는 것이다. 그렇게 고난을 인내하다보면 어느덧 그 순간이 기회가 되어 나에게 복을 가져다준다. 한편, 행운의 순간은 마치 달콤한 미끼처럼  인간을 현혹시킨다. 행운이라 믿었던 것이 어느 순간 재앙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승승장구하는 인생의 한 순간에서도 항상 겸손하고 성실한 평상심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오로지 여여한 평상심을 지니는 것이 자신을 지키고 복덕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다.

 끌어당김의 법칙은 꽤나 설득력 있는 의식의 전환법이다. 혹여 누군가는 끌어당김의 법칙을 유사과학이나 대중들을 홀려놓는 사이비 심리학 정도로 여기지만, 난 오히려 지나친 과학만능주의적 시각에 대한 비판이 필요하다고 본다. 특히 심리학이나 정신병리학의 분야에서는 약리학의 몇몇 성과 외에는 과학적 관점이 그렇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과학적 관점에서 접근한 심리학과 정신병리학이 과연 현대인들의 정신적 피로와 상처의 치유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단지 물리적인 약처방으로 단발적인 억제만 가능할뿐 그마저도 결국 평생 약에 의존해야 하는 삶을 초래한다. 즉 심리학과 정신병리학은 과학적 관점이 아닌 다양한 세계에 더욱 열린 시각을 가져야한다.

 끌어당김의 법칙을 단지 과학적 관점에서만 들여다보지 말라고 한 것이 서론이 조금 길었다. 그렇다! 끌어당김의 법칙은 과학적이지는 않지만 웬지 직감적으로 매우 설득력이 있다. 실제로 끌어당김의 법칙에서 주장하는데로 내 의념의 주파수가 우주적 존재에게 전파되고 그것이 현실을 창조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상상하고 마음먹는 의념에 따라 삶을 바라보는 관점과 시점이 변화하고 이것은 필히 나의 삶과 현실창조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이치는 부정할 수 없다. 내가 'A'를 원하면 당연히 예전에는 내 주변에서 그냥 지나쳤던 'A'와 관련된 정보들이 내 눈에 더욱 많이 띌 것이며 내 삶의 지향점과 노력의 방향이 A에 맞춰질 것이다. 또한 그로 인해 삶의 어느 순간에서 A를 얻을 확률도 매우 높아질 것이다. 이것은 끌어당김의 법칙이 아니더라도 삶의 당연한 이치이다.

 끌어당김의 법칙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내가 삶에서 가지는 부정적인 의식, 저항감 역시 내 삶의 현실창조를 불러온다고 한다. 내가 빈곤하고 외로운 이유, 나의 불운과 불행 등등 이 모든 나의 현실이 나에게 습관화된 부정적인 의식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부정의식을 제거하여 희망찬 상상으로 심상화 하면 내 삶이 혁명적으로 변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이 역시 굳이 주파수와 우주차원의 에너지를 운운하지 않더라도 삶의 당연한 이치이다. 내가 나 자신을 항상 돈도 못버는 서민층이라 여기는 그 마인드 자체가 나를 서민층에서 못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보다 부유한 계층으로 향상될 수 있는 수많은 기회가 나를 알게 모르게 지나쳐갔겠지만, 나 스스로를 존중할 줄 모르고 내가 그만한 권리를 누릴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자각이 없어 그 기회들을 흘려보냈을 것이다.

 끌어당김의 법칙은 우주의 수많은 법칙 중 하나이다. 또한 심상화는 의념을 집중시키는 하나의 도구이다. 사실은 끌어당김의 법칙보다 더욱 근본적인 법칙들이 있으며 이 근본적인 법칙에 근거한 끌어당김의 법칙이라야 진정한 힘이 있다. 끌어당김의 법칙에 선행되어야 할 법칙은 바로 명상을 통한 '참나체험'이다. 참나체험이 없는 끌어당김의 법칙은 끝모를 욕망과 이기주의일 수 있다.

 참나체험이란 우주와 나를 분리하는 에고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우주와 나를 일체적으로 보는 체험이다. 에고의식은 끊임없이 우주와 나를 분리시키고, 나와 타자를 분리시킨다. 이렇게 분리된 세상에는 경쟁과 생존 그리고 고독과 외로움 밖에 없다. 분리된 자의식이 의념을 집중하여 무언가를 끌어당긴다고 해보자.과연 그것이 제대로 현실을 창조할 수 있을까? 분열된 의식은 굉장히 이기주의적인 상상밖에 할 줄 모른다. 예를 들어 '좋은 대학 붙게 해주세요' '지원한 회사에 내가 붙게 해주세요.' '내가 미워하는 저 사람을 죽여주세요. 다치게 해주세요.' 이런 것 따위에 의념을 집중한다 해보자. 과연 이 메세지가 들어질까? 물론 경쟁의식을 가지고 미친듯이 공부하고, 스펙을 쌓고, 암살기술을 키워 사람을 다치게하여 성취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렇게 성취한 것을 끌어당김의 법칙이라 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분열된 에고의식의 경쟁과 쟁취일 뿐이다.
 개인이 끌어당김의 법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득바득 경쟁하여 얻어 쟁취할지 모르나, 이러한 것들을 심상화하고 끌어당김의 법칙을 한다고 해서 이뤄질 일은 없다. 왜냐하면 이는 누구나 얻길 원하기 때문이다. 나 아닌 무수한 사람들 또한 1등이길 바라고, 취업이 되길 바란다.  내가 누군가를 죽거나 다치게 하길 바라지만, 그 사람 자신 혹은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가 건강하길 바란다. 그런데 내가 의식으로 심상화를 한다고 해서 그것이 이뤄진다는 것은 지나친 모순이다.

 그러므로 참나체험에 의한 우주와 나는 일체된 존재라는 자각 없이 분열된 에고의식에 의한 욕구충족은 끌어당김의 법칙에서 제외될 수 밖에 없다. 진정한 끌어당김의 법칙이란 나와 우주가 일체되었음을, 나와 타자가 다르지 않음을,  우주 전체가 나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고 있음을 아는 것이다. 하여 나의 삶이 항상 옳고 행복한 방향으로 흐를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고, 삶의 좌절이나 불행이 닥치더라도 그것이 찾아온 이유를 살피고 삶이 건강하고 행복한 방향으로 흐를 수 있도록 전환하는 의식의 힘이다. 또한 그로 인해 나날이 자유롭고 행복한 나, 당당히 주체적이고 나 다운 나로 살아가는 방법인 것이다. 오로지 이것을 위한 심상화와 끌어당김만이 힘을 지닌다.
 혹여 내가 1등을 하지 못하더라도, 내가 취업에 성공을 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살피고, 나 아닌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하더라도 또 다른 나로 여기고 응원해주어라. 그리고 이 한번의 좌절 역시 훗날 나를 더 자유롭고 행복한 삶으로 인도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고, 당당하고 힘찬 걸음을 해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끌어당김의 법칙이다.

 

 레게의 전설 밥말리의 명곡 No Woman No Cry'에서 'Everything's gonna ba alright'을 반복하여 되내이는 구절이 있다. 이 노래의 전체가 다 감동이지만 나는 그 구절에서 항상 눈시울을 붉힌다. 마치 밥말리 아저씨가 하느님과 손잡고 나를 위로해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Everything's gonna be alright' 이것은 매우 강력한 주문이자 진리이다. 이 우주의 모든 것은 다 그 존재이유가 있다. 그래서 세상에 존엄하지 않은 존재는 없는 것이다. 내가 그 자신의 존엄성을 굳게 믿을 때 내 삶에서 마주하는 모든 고난들 역시 결국 나를 더 행복한 길로 이끌어주는 여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삶에서 찾아오는 모든 고난, 위기들... 그들에 굴복하고 절망할 필요가 없다. 그 순간에 처해서도 항상 고요하고 여여한 마음을 지닐 때 고난이 손짓해주는 삶의 새로운 방향과 기회를 직시할 수 있는 것이다.

'삶의 위기도 기회도 모두 내 삶을 더 좋게 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이것이 우주의 강력한 법칙이다. 고난과 불행 또한 결국 행운과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라. 그 순간에 절망하지 말라. ''Everything's gonna be alright' 오로지 이 강력한 힘을 믿고 자신을 사랑하라. 내 삶에서 불행과 위기가 찾아올 때 그 순간을 매우 세밀히 관찰해보라. 이것이 나에게 주는 메세지는 무엇인가? '무엇을 돕고자?' 더 좋은 미래를 가져오고자 나에게 이런 고난이 찾아온 것인가! 훗날 나는 분명 더 행복할 것이리라. 

https://youtu.be/2Dq33kK9nDU

 

 

 명상이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가장 큰 힘과 에너지를 주는 것은 바로 '평상심'이다. 어찌보면 희노애락과 생로병사로 가득한 인생에서 평상심을 지니는 것이 명상의 최종적인 목적일 수 있다. 우리는 누구나 삶에서 위기를 겪는다. 하지만 명상을 수련하면 이 위기의 순간을 지혜롭게 넘기게 된다. 왜냐하면 위기의 또 다른 단면을 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흰히 '위기는 기회다.' 라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위기는 정말 기회가 맞다. 삶에서 맞이하는 위기의 상황은 대게 상실감에 기인한다. 무언가를 잃는 것이다. 직장을 잃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건강을 잃고, 재산을 잃고... 하지만 명상수련을 하는 사람들은 알고 있다. '비워지면 채워진다'는 것을. 모든 것이 비워지면 채워지게 마련이다. 삶의 비워진 자라에는 또 다른 삶이 채워지기 마련이다. 어쩌면 기존의 삶보다 더 좋은 것이 채워질 수도 있다. 명상수련을 하는 사람은 이를 알기 때문에 상실과 위기의 순간에 절망하지 않는다. '이 위기 덕분에 더 좋은 것이 올 수 있다!' 는 가능성에 마음이 열려있으므로 위기와 상실의 순간에도 평화롭고 여유로운 마음을 유지할 수 있다.

 평화롭고 여유로운 상태를 유지하기 때문에 주변에서 삶의 새로운 기회들이 찾아오는 것이다. 절망하여 술과 약물과 절망감에 쩔어있는 사람에게 주변의 어느 누가 새로운 기회를 주고 싶을까. 위기가 찾아와도 평소처럼 성실하고 맑은 상태를 유지할 때 주변의 사람들도 새로운 기회를 전해주는 것이다. 명상수련을 하는 사람들은 항상 이 '맑고 고요한 상태'를 유지하여 전일하고 성실하게 생활할 뿐이다.

 반면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삶을 살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사실은 성공하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을 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일 수 있다. 잃어버릴 것이 많기 때문이다. 또한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건강과 정신을 헤칠 상황이 많이 생기며, 많은 것을 가졌다는 사실이 사람을 오만불손하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명상수련을 하는 사람들은 알고 있다. 이 또한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물질의 상태는 항상 변화하는 것이다. 나에게 온 물질적인 것들은 어느 순간 내 손을 떠날 수 있는 것이다. 영원한 물질의 집착은 없다. 명상수련을 하는 사람은 이 변화의 상태를 항상 관찰하기 때문에 많은 것을 소유하고도 집착하지 않는다. 그 하고 많은 물량이 다 내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항상 겸손할 수 있다. 진정 지켜야 할 내면의 본질에 충실하기 때문에 많은 것을 가지고도 집착하지 않고 겸손하다. 집착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내 곁을 오랫동안 떠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많은 재산과 명예를 가지고 있다고해서 그것이 모두 내 것이라 동일시 해버려 오만방자 해지는 사람들에게는 언젠가 그것들이 다 떠날 것이다. 물질계는 항상 서로 저항하고 부딧히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집착과 이기심의 덩어리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주변의 저항을 사게되고 그것은 파멸하게 되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명상수련자는 물질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오로지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곁에 두는 것이다. 고요하고 여여한 내면의 진실만을 지켜나갈 뿐이다. 

 원하는 것을 이루게 하지 못하는 것은 내 내면에 집착하는 감정이다. ‘언젠가는 될거야. 언젠가는 할 수 있을거야. 언젠가는 이곳을 벗어날거야.’ 그놈의 ‘언젠가는’을 통해 우리는 미래의 어느 순간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고 괴롭히고 있다. 하지만 결국 ‘언젠가는’ 이라는 먼 미래를 담보하는 감정과 먼 미래에 대한 집착의 에너지에 우리는 구속한다. 즉 무언가 ‘집착’ 하는 그 감정 자체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결국 원하고자 하는 대상이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집착하는 감정이 목적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될 것이라고 스스로 암시하며, 현재의 집착하는 감정을 되풀이하고 그 것에 빠져있는 것이다.

 

 진정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한다면 지금 당장 해라. ‘Just Do It' 부자가 되고 싶으면 지금 당장 부자가 되라. ’지금 나는 이미 부자다.‘ 라는 생각을 확실하게 가져라. 내가 지금 통장에 잔고가 0원이든, 100만원이든 그 물질 자체는 상대적인 것이다. 누군가에겐 100만원을 가진 것도 부자일 수 있고, 건강한 몸 하나 가진 것도 부자일 수 있다. 내가 부자라 생각하지 않는 것은 단지 나 자신이다.

 

 내가 지금 100만원을 가지고 있는데 나 자신을 부자라 생각한다면 어떻게 행동할까? 100만원자리 핸드백을 사버려 전 제산을 탕진하는 것은 ‘거지 마인드’이다. 100만원을 아끼고 아껴 조금씩 저축하는 것은 ‘서민 마인드’이다. 진정한 부자라면 그 100만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투자하여 200만원으로 불리고, 200만원을 다시 400만원으로 늘리는 최적의 지혜로운 경제활동을 구상하고 적극적으로 실행할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부자마인드’이다. 하지만 내가 가진 100만원의 가치를 모르고 훗날 부자가 될 것이라는 의식에 사로잡혀 그 100만원을 적금통장에 묵혀놓고 하기 싫은 온갖 일을 하며 10만원, 20만원 차곡차곡 모은다면 부자가 되는데 꽤 오랜 시간이 흘러갈 것이다.(그래도 먼 훗날 부자가 될 가능성은 있다.)

 

 중년이여! 자연인이 되고 싶으면 지금 당장 자연인이 되라. 당장 회사를 때리치라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에 텐트와 배낭이라도 넣고 다니며 주말이며 짬이 나는 반나절 동안 자연에 들어가 ‘나는 지금 이미 자연인이다.’ 라고 생각하고 지금 이 순간을 누려라. 자식들 다 분가시켜 놓고, 은퇴하여 연금 받으며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자연이이 될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면 막상 자연인이 된 모든 조건이 갖춰진 순간 주저할 것이며, 매우 허탈할 것이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지금 당장 하라. ‘Just Do It' 이것이 오로지 ’Be yourself'로 가는 지름길이다. 나 자신이 이미 내가 원하는 존재가 되었다 여기고 지금 이 순간부터 원하는 것을 해보자!


 과학과 종교는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진리를 탐구하는 훌륭한 인류의 문화유신이지만 때로는 이와 같은 인식의 오류 때문에 편협한 길을 걷게 된다.

 "과학은 검증할 수 없는 것을 부정해버리고, 종교는 증명할 수 없는 것을  단정지어버리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과학이 가장 가장 파워풀한 논리는 바로 '증명과 검증'이다. 과학의 이론은 모두 검증되지 않으면 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어떤 인류의 문화유산보다 신뢰가 간다. 하지만 과학의 근본이 된 경험주의 철학은 본래 검증할 수 없는 것들에는 '침묵'하는 것이지 결코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침묵과 부정이란 정말 큰 차이가 있다. 침묵한다는 것은 아직 알 수 없는 신비로움에 대한 존중이다. 다만 아직 검증할 수 없기에 판단을 중지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검증할 수 없는 신비를 부정해버리면 모든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편협한 생각의 감옥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과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정말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알 수 없는 신비에 침묵하여야한다. 하지만 절대 이를 부정하여서는 안된다.

 과학과 반대로 종교는 검증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단정지어 버린다. 신, 하나님, 온갓 신비로운 우주의 법칙과 초능력.... 이런 것들에 대해 너무 쉽게 그 존재를 단정해버리고 우상을 만들어 버린다. 이는 자칫 매우 우매한 길로 빠질 수 있는 것이다. 평생에 걸쳐 믿어온 것이 어느 누군가의 뇌속에서 일어난 망상이었다고 생각해보라... 정말 비참할 것이다. 그런데 종교에서는 이런 일이 너무 쉽게 허용되고 있다. 종교적 설화와 교리들의 상당수가 검증할 수 없는 무언가를 카리스마적 교주들에 의해 단정지어져 버리고 이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무리들에 의해 믿어져버린다.
 
 결국 종교와 과학 모두 검증할 수 없는 신비에 대해서는 침묵해야한다. 단정도 긍정도 부정도 아닌 침묵, 오로지 이 침묵만이 진리에 이르는 가장 신중한 자세이다.


 불교사상을 공부함에 있어 가장 큰 오해와 망상에 빠지는 부분이 바로 '공(空)' '무상(無想)' '무아(無我)' 에 대한 것이다. 사실은 '없다' 가 아니라 '아니다' 라고 표기해야 올바른 설명이 되는 부분인데 '없다'라고 표기해버리니 모든 것이 없고 공허하다라는 허무주의에 빠지게 만든다.

 정확한 이해는 '색성향미촉법'과 '오온(법수상행식)'은 진짜 나가 '아니다' 라는 표현이 옳다. 이 설명이 석연치 않게 느껴진다면 두 눈 똑바로 뜨고 대표적인 불경 몇가지를 제대로 읽어보길 바란다. 어느 불경에서도 부처님은 이 세상은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주의를 설파하지 않았다. 다만 오온이 내가 아니고, 색성향미촉법이 내가 아니고, 형상이 내가 아니라고 하였다. 이 모든 것이 내가 아님을 깨달을 때 바로 '그 자리'의 실체를 파악한다면 허망하지 않고 열반을 얻을 수 있다한 것이다.

 부처님은 '실존'과 '열반'을 적극 옹호한 분이다. 다만 이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은 최소화하였다. 그렇지만 존재의 실존을 직관하는 깨어었음, 고통이 소멸된 열반의 상태를 옹호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이 세상은 '아무 것도 없다' 라고 해석했다는 오해를 산 것일까?

 대승불교는 많은 부분에서 긍정적인 작용을 하였지만, 대중을 설득하고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언어적 장치가 필요하였다. 이는 기독교 역시 마찬가지이다. 기독교 역시 글조자도 모르는 대중들에게 진리를 이해시키기 위해 많은 서사적 장치를 추가한 것이다. 하지만 대중들은 이 '장치'들을 직설적으로 믿어버렸다. 심지어 이 장치들에 집착하여 본말전도가 되어버리는 상황까지 치닫는다.

 불교를 공부함에 있어 가장 유의하여야 하는 부분이 바로 이 '아무 것도 없다'는 공사상에 대한 삿된 견해이다. 불교를 공부하며 허망함을 느낀다면 이는 매우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모든 고통이 소멸된 상태, 그 여여한 침묵의 상태에서부터 행복한 삶을, 깨어있는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 진정한 불교의 메세지이다.


전생과 윤회는 우리에게 있어 꽤나 흥미가 가는 이야기거리이다. 우리는 왜 전생이나 윤회에 흥미를 느끼는 것일까? 일단 전생이라는 것은 꽤나 낭만적이다. 전생은 내 안에 나도 모르는 과거와 어떠한 삶의 발자취가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매우 낭만적이며, '나 조차도 모르는 또 다른 나' 를 만나게 해주는 신비로운 창구가 되기도 한다.
 전생이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서 전생이 심리적으로 자신의 내면에 존재한 또 다른 자아를 탐색하기 위한 도구가 되기도한다. 이는 마치 타로카드와 같다. 타로카드처럼 우연에 의해 생성된 어떠한 이미지를 패로 두고 이를 거울삼아 사실은 나의 내면을 탐색하는 것이다. 이는 심리적인 치유의 한 방법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전생체험을 유도하는 최면술사나 심리상담가가 상담자를 최면상태에 빠져들게 하여 그의 무의식에서 나오는 이미지나 언어를 포착한다. 또한 심지어는 상담가가 전생을 리딩한다하며, 상담자를 보고는 전생을 술술 말해주기까지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생이 존재하느냐가 아니다. 그 떠오르는 이미지가 진짜 전생이느냐가 아니다. 그저 어떤 이유로든 포착된 무의식 속의 이미지를 거울삼아 사실은 상담자의 내면을 관찰하는 거울 같은 도구로 삼는 것이다. 어디로가든 종착역에 도착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상담자의 내면에 있는 어떠한 문제점을 끄집어내어 그것을 해소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전생과 윤회는 또한 현재의 부조리를 설명하는 수단이 된다. 많은 종교에서는 어떠한 이상향을 제시한다. 하지만 그 이상향에 비해 현실은 매우 불평등하고 참혹하다. 누구든 삶에서 자신이 처한 고난과 불공정함에 대한 설명을 원한다. 그럴때 사용하는 도구가 바로 '전생의 업보'인 것이다. '현재 나의 모습은 전생으로부터 이어져온 인연법에 의해 갖춰진 것이고, 앞으로의 모습은 현재가 지어간다.'는 강력한 논리는 과학적이냐를 떠나서 굉장히 힘있는 설득력을 갖추기 마련이다. 적어도 현재 나의 모습에 대한 부조리를 해소하지는 못해도 앞으로 내가 살아갈 삶은 현재 나의 모습이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생이나 윤회는 명상과 수행에 입문하는 초보수련자들을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 이에 너무 집착할 필요는 없다. 사실 '참나'의 시각에서 볼때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영원불멸성의 참나의 시각에서 시간성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시간의 흐름이란 유한한 존재가 생멸의 과정에서 느끼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절대자에게 시간성은 필요없다.
 명상의 깊은 상태에서는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수히 이어지는 현재만 있을 뿐이다. 무수히 이어지는 현재에 육신과 같이 별리의 상태가 찾아온다면 시간성이 부여되는 것이다. 하지만 '참나'는 시간성이 부여되지 않느다. 영원한 현재만 있을 뿐이다.
 그렇게 때문에 진정한 수행자라면 전생체험이나 이러한 것들에 집착할 이유가 없다. 다만 현재의 참나에 등불을 밝혀라! 오직 이것만 있을 뿐이다. 현재의 참나에 등불을 밝히는 것이 과거와 미래를 모두 밝히는 것이다. 오로지 현재를 밝힘으로써 과거의 업보도, 미래의 그늘도 걷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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