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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가끔 이럴때가 있다. 뒤집혀서 허우적 거리고 있는 풍뎅이나 창틈과 같이 고립된 공간에 갇힌 날벌레들이 보기 안타까워 풀어주려고하면 이 녀석들이 자기를 헤치려는줄 알고 더 발버둥을 치곤 하는 순간 말이다. 그리고 이런 순간에는 가끔 삶의 어느순간에서 고난에 처해 발버퉁치는 내 모습이 오버랩된다.

 벌레에게 자신을 구해주려는 인간의 의도는 감지할 수 없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삶의 고난에서 자신을 구원해주려는 신의 손길을 감지할 수 없다. 그렇다보니 신의 손길을 더 큰 고난이 덥치려는줄 알고 더 물어뜯고 저주한다. 신의 구원이나 행운은 우리에게 마치 거친 손길처럼 고난의 껍질을 쓴 채 찾아올 수도 있는 것이다.

 삶에서 처한 고난이 훗날 생각해보면 큰 행운인 경우가 꽤 많다. 위기는 기회라고, 지나고보면 그 위기의 순간이 인생 최고의 기회였던 것이다. 또한 세옹지마라하지 않았던가. 행운과 불행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찾아오는 것이지 일방적인 행운도 불행도 없다.

 그래서 인간은 고난의 순간에 처해서도 평상심을 유지하고 자신을 지키며, 맑고 또렷한 정신을 지켜야하는 것이다. 그렇게 고난을 인내하다보면 어느덧 그 순간이 기회가 되어 나에게 복을 가져다준다. 한편, 행운의 순간은 마치 달콤한 미끼처럼  인간을 현혹시킨다. 행운이라 믿었던 것이 어느 순간 재앙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승승장구하는 인생의 한 순간에서도 항상 겸손하고 성실한 평상심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오로지 여여한 평상심을 지니는 것이 자신을 지키고 복덕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다.

 나는 대안학교에서 근무하며 공부를 강요함으로써 부작용이 생겼던 많은 학생과 이 학생들이 과거의 상처를 딛고 개선되는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다. 공부하지 않으려는 학생들의 공통점이 있는데 이는 우문현답으로 들릴지 모르나 '공부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너무 뻔한 대답인가? 아니다. 공부를 싫어한다는 것을 진단했다면 그 이후의 행동을 어떻게 해야할까? 진짜 큰 문제는 공부를 싫어하는데 공부를 강요함으로써 생긴다. 공부에 대한 부정적 인식만 잔뜩 키워주기 때문에 결국 공부를 못하는 것은 물론 인격적인 면에서부터 큰 문제를 초래할 수도 있게 된다. 공부를 싫어하는 학생들에게는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이 역시 너무 당연하게도 공부의 재미있는 면을 '느끼게' 해줌으로써 공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전환시켜주는 것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인데 특히 부모들은 이 이치를 무시한다. 왜냐하면 자녀에 대한 '욕심' 때문이다. 욕심이 있으면 지혜롭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욕심만 채우려 계속 어리석은 행동을 한다. 결국 파국만 있을 뿐이다.

 내가 대안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며 학교에 들어올때만 하더라도 공부라면 치를 떨던 아이들이 1,2년 뒤엔 점차 공부를 하겠다는 각오와 마음을 내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보았다. 내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대안학교에 근무한 많은 교사들은 동일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대안학교에서의 생활을 통해 공부에 대한 인식이 전환되는 이유는 일단 시험제도가 없기 때문이다. 남들과 비교도 평가도 하지 않고, 시험을 위해 억지로 공부할 필요도 없다. 공부에 대한 일제의 강요를 내려놓음으로써 아이들은 개선된다.
 또한 공부에 대한 강요를 내려놓는 것만이 이런 혁명적인 변화의 이유는 아니다. 공부가 싫은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주어야 할 것은 억지로 공부시키는 것이 아닌 본인들이 본보기를 보임으로써 지속적으로 '영감'을 주는 것이다. 아이들은 훌륭하고 멋진 주변어른들의 행동과 실천을 통해 영감과 감동을 느끼며 커간다. 본인도 못하는 것을 아이에게 강요하는 것이야말로 최악의 행동이다. 아이에게 공부를 하도록 하고 싶으면, 스스로 공부하는 멋진 어른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지속적인 영감을 주어야한다.
 앞의 두가지가 이뤄지면 다음으로 진행할 것은 넓은 세상과 다양하고 깊은 삶의 경험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아이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주지 않고, 공부의 필요성을 깨우쳐주지 않은채 공부를 시키려해봤자 어떤 동기유발도 일어날 수 없다. 스스로 삶의 경험을 통해 공부의 필요성과 동기를 찾도록 도와야한다.

 이 모든 것을 충족했을때 비로소 호랑이 같이 무섭고 훌륭한 큰 스승을 모셔 아주 치열하고 치밀한 공부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아이가 스스로 공부를 할 필요성을 느끼도록 돕는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심지어 공부에 대한 강요로 인해 큰 마음의 상처를 입은 아이는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 혹여 다른 아이들은 저렇게 훌륭한데, 내 아이는 왜 이럴까? 이런 푸념이나 늘어놓고 있지 않은가? 나도 다른 부모 못지 않게 많은 것을 퍼다주었는데 애가 왜 이럴까? 그것은 아이에게 정작 필요한 '영감'과 '사랑'은 주지 않은채 엉뚱한 것만 잔뜩 퍼주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려고만 했지, 진정으로 아이와 소통하고 공감하지 않은 것이다. 이 말이 피상적으로 들릴지 모르나 난 대안학교 교사로서 경험을 통해 확신해서 하는 말이다. 심지어 부모도 아닌 내가 아이들에게 진심으로 다가서고 사랑을 줄 때 아이들은 변화하였다. 하물며 부모가 아이에게 그런 것을 주었다면 그 아이는 엄청 더 큰 성장을 했을 것이다. 다만 부모가 그 이치를 깨우치지 못했을 뿐이다.

 남의 아이가 훌륭하고 부럽다고 푸념하지만, 사실 그 부모는 아이에게 참으로 적절하고 정확한 교육적 영감과 사랑을 아이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랜 시간 바른 정성을 들였기 때문이다. 이렇듯 모든 것이 정확한 인과관계에 의해 흐른다. 아이에게서 문제가 드러난다면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욕심많은 삶을 살아왔는지 돌아봐야한다. 불교의 말처럼 탐하고, 분노하고, 어리석은 것에 의해 인간은 고통받는다. 또한 이 탐진치에 의해 아이들의 맑은 영혼은 다치는 것이다. 부모가 본인의 탐진치를 내려놓고 깨우침을 얻을 때 아이 또한 혁명적으로 변화한다.

 끌어당김의 법칙은 꽤나 설득력 있는 의식의 전환법이다. 혹여 누군가는 끌어당김의 법칙을 유사과학이나 대중들을 홀려놓는 사이비 심리학 정도로 여기지만, 난 오히려 지나친 과학만능주의적 시각에 대한 비판이 필요하다고 본다. 특히 심리학이나 정신병리학의 분야에서는 약리학의 몇몇 성과 외에는 과학적 관점이 그렇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과학적 관점에서 접근한 심리학과 정신병리학이 과연 현대인들의 정신적 피로와 상처의 치유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단지 물리적인 약처방으로 단발적인 억제만 가능할뿐 그마저도 결국 평생 약에 의존해야 하는 삶을 초래한다. 즉 심리학과 정신병리학은 과학적 관점이 아닌 다양한 세계에 더욱 열린 시각을 가져야한다.

 끌어당김의 법칙을 단지 과학적 관점에서만 들여다보지 말라고 한 것이 서론이 조금 길었다. 그렇다! 끌어당김의 법칙은 과학적이지는 않지만 웬지 직감적으로 매우 설득력이 있다. 실제로 끌어당김의 법칙에서 주장하는데로 내 의념의 주파수가 우주적 존재에게 전파되고 그것이 현실을 창조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상상하고 마음먹는 의념에 따라 삶을 바라보는 관점과 시점이 변화하고 이것은 필히 나의 삶과 현실창조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이치는 부정할 수 없다. 내가 'A'를 원하면 당연히 예전에는 내 주변에서 그냥 지나쳤던 'A'와 관련된 정보들이 내 눈에 더욱 많이 띌 것이며 내 삶의 지향점과 노력의 방향이 A에 맞춰질 것이다. 또한 그로 인해 삶의 어느 순간에서 A를 얻을 확률도 매우 높아질 것이다. 이것은 끌어당김의 법칙이 아니더라도 삶의 당연한 이치이다.

 끌어당김의 법칙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내가 삶에서 가지는 부정적인 의식, 저항감 역시 내 삶의 현실창조를 불러온다고 한다. 내가 빈곤하고 외로운 이유, 나의 불운과 불행 등등 이 모든 나의 현실이 나에게 습관화된 부정적인 의식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부정의식을 제거하여 희망찬 상상으로 심상화 하면 내 삶이 혁명적으로 변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이 역시 굳이 주파수와 우주차원의 에너지를 운운하지 않더라도 삶의 당연한 이치이다. 내가 나 자신을 항상 돈도 못버는 서민층이라 여기는 그 마인드 자체가 나를 서민층에서 못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보다 부유한 계층으로 향상될 수 있는 수많은 기회가 나를 알게 모르게 지나쳐갔겠지만, 나 스스로를 존중할 줄 모르고 내가 그만한 권리를 누릴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자각이 없어 그 기회들을 흘려보냈을 것이다.

 끌어당김의 법칙은 우주의 수많은 법칙 중 하나이다. 또한 심상화는 의념을 집중시키는 하나의 도구이다. 사실은 끌어당김의 법칙보다 더욱 근본적인 법칙들이 있으며 이 근본적인 법칙에 근거한 끌어당김의 법칙이라야 진정한 힘이 있다. 끌어당김의 법칙에 선행되어야 할 법칙은 바로 명상을 통한 '참나체험'이다. 참나체험이 없는 끌어당김의 법칙은 끝모를 욕망과 이기주의일 수 있다.

 참나체험이란 우주와 나를 분리하는 에고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우주와 나를 일체적으로 보는 체험이다. 에고의식은 끊임없이 우주와 나를 분리시키고, 나와 타자를 분리시킨다. 이렇게 분리된 세상에는 경쟁과 생존 그리고 고독과 외로움 밖에 없다. 분리된 자의식이 의념을 집중하여 무언가를 끌어당긴다고 해보자.과연 그것이 제대로 현실을 창조할 수 있을까? 분열된 의식은 굉장히 이기주의적인 상상밖에 할 줄 모른다. 예를 들어 '좋은 대학 붙게 해주세요' '지원한 회사에 내가 붙게 해주세요.' '내가 미워하는 저 사람을 죽여주세요. 다치게 해주세요.' 이런 것 따위에 의념을 집중한다 해보자. 과연 이 메세지가 들어질까? 물론 경쟁의식을 가지고 미친듯이 공부하고, 스펙을 쌓고, 암살기술을 키워 사람을 다치게하여 성취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렇게 성취한 것을 끌어당김의 법칙이라 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분열된 에고의식의 경쟁과 쟁취일 뿐이다.
 개인이 끌어당김의 법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득바득 경쟁하여 얻어 쟁취할지 모르나, 이러한 것들을 심상화하고 끌어당김의 법칙을 한다고 해서 이뤄질 일은 없다. 왜냐하면 이는 누구나 얻길 원하기 때문이다. 나 아닌 무수한 사람들 또한 1등이길 바라고, 취업이 되길 바란다.  내가 누군가를 죽거나 다치게 하길 바라지만, 그 사람 자신 혹은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가 건강하길 바란다. 그런데 내가 의식으로 심상화를 한다고 해서 그것이 이뤄진다는 것은 지나친 모순이다.

 그러므로 참나체험에 의한 우주와 나는 일체된 존재라는 자각 없이 분열된 에고의식에 의한 욕구충족은 끌어당김의 법칙에서 제외될 수 밖에 없다. 진정한 끌어당김의 법칙이란 나와 우주가 일체되었음을, 나와 타자가 다르지 않음을,  우주 전체가 나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고 있음을 아는 것이다. 하여 나의 삶이 항상 옳고 행복한 방향으로 흐를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고, 삶의 좌절이나 불행이 닥치더라도 그것이 찾아온 이유를 살피고 삶이 건강하고 행복한 방향으로 흐를 수 있도록 전환하는 의식의 힘이다. 또한 그로 인해 나날이 자유롭고 행복한 나, 당당히 주체적이고 나 다운 나로 살아가는 방법인 것이다. 오로지 이것을 위한 심상화와 끌어당김만이 힘을 지닌다.
 혹여 내가 1등을 하지 못하더라도, 내가 취업에 성공을 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살피고, 나 아닌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하더라도 또 다른 나로 여기고 응원해주어라. 그리고 이 한번의 좌절 역시 훗날 나를 더 자유롭고 행복한 삶으로 인도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고, 당당하고 힘찬 걸음을 해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끌어당김의 법칙이다.

 

 레게의 전설 밥말리의 명곡 No Woman No Cry'에서 'Everything's gonna ba alright'을 반복하여 되내이는 구절이 있다. 이 노래의 전체가 다 감동이지만 나는 그 구절에서 항상 눈시울을 붉힌다. 마치 밥말리 아저씨가 하느님과 손잡고 나를 위로해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Everything's gonna be alright' 이것은 매우 강력한 주문이자 진리이다. 이 우주의 모든 것은 다 그 존재이유가 있다. 그래서 세상에 존엄하지 않은 존재는 없는 것이다. 내가 그 자신의 존엄성을 굳게 믿을 때 내 삶에서 마주하는 모든 고난들 역시 결국 나를 더 행복한 길로 이끌어주는 여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삶에서 찾아오는 모든 고난, 위기들... 그들에 굴복하고 절망할 필요가 없다. 그 순간에 처해서도 항상 고요하고 여여한 마음을 지닐 때 고난이 손짓해주는 삶의 새로운 방향과 기회를 직시할 수 있는 것이다.

'삶의 위기도 기회도 모두 내 삶을 더 좋게 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이것이 우주의 강력한 법칙이다. 고난과 불행 또한 결국 행운과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라. 그 순간에 절망하지 말라. ''Everything's gonna be alright' 오로지 이 강력한 힘을 믿고 자신을 사랑하라. 내 삶에서 불행과 위기가 찾아올 때 그 순간을 매우 세밀히 관찰해보라. 이것이 나에게 주는 메세지는 무엇인가? '무엇을 돕고자?' 더 좋은 미래를 가져오고자 나에게 이런 고난이 찾아온 것인가! 훗날 나는 분명 더 행복할 것이리라. 

https://youtu.be/2Dq33kK9nDU

 

 

 명상이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가장 큰 힘과 에너지를 주는 것은 바로 '평상심'이다. 어찌보면 희노애락과 생로병사로 가득한 인생에서 평상심을 지니는 것이 명상의 최종적인 목적일 수 있다. 우리는 누구나 삶에서 위기를 겪는다. 하지만 명상을 수련하면 이 위기의 순간을 지혜롭게 넘기게 된다. 왜냐하면 위기의 또 다른 단면을 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흰히 '위기는 기회다.' 라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위기는 정말 기회가 맞다. 삶에서 맞이하는 위기의 상황은 대게 상실감에 기인한다. 무언가를 잃는 것이다. 직장을 잃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건강을 잃고, 재산을 잃고... 하지만 명상수련을 하는 사람들은 알고 있다. '비워지면 채워진다'는 것을. 모든 것이 비워지면 채워지게 마련이다. 삶의 비워진 자라에는 또 다른 삶이 채워지기 마련이다. 어쩌면 기존의 삶보다 더 좋은 것이 채워질 수도 있다. 명상수련을 하는 사람은 이를 알기 때문에 상실과 위기의 순간에 절망하지 않는다. '이 위기 덕분에 더 좋은 것이 올 수 있다!' 는 가능성에 마음이 열려있으므로 위기와 상실의 순간에도 평화롭고 여유로운 마음을 유지할 수 있다.

 평화롭고 여유로운 상태를 유지하기 때문에 주변에서 삶의 새로운 기회들이 찾아오는 것이다. 절망하여 술과 약물과 절망감에 쩔어있는 사람에게 주변의 어느 누가 새로운 기회를 주고 싶을까. 위기가 찾아와도 평소처럼 성실하고 맑은 상태를 유지할 때 주변의 사람들도 새로운 기회를 전해주는 것이다. 명상수련을 하는 사람들은 항상 이 '맑고 고요한 상태'를 유지하여 전일하고 성실하게 생활할 뿐이다.

 반면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삶을 살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사실은 성공하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을 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일 수 있다. 잃어버릴 것이 많기 때문이다. 또한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건강과 정신을 헤칠 상황이 많이 생기며, 많은 것을 가졌다는 사실이 사람을 오만불손하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명상수련을 하는 사람들은 알고 있다. 이 또한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물질의 상태는 항상 변화하는 것이다. 나에게 온 물질적인 것들은 어느 순간 내 손을 떠날 수 있는 것이다. 영원한 물질의 집착은 없다. 명상수련을 하는 사람은 이 변화의 상태를 항상 관찰하기 때문에 많은 것을 소유하고도 집착하지 않는다. 그 하고 많은 물량이 다 내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항상 겸손할 수 있다. 진정 지켜야 할 내면의 본질에 충실하기 때문에 많은 것을 가지고도 집착하지 않고 겸손하다. 집착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내 곁을 오랫동안 떠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많은 재산과 명예를 가지고 있다고해서 그것이 모두 내 것이라 동일시 해버려 오만방자 해지는 사람들에게는 언젠가 그것들이 다 떠날 것이다. 물질계는 항상 서로 저항하고 부딧히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집착과 이기심의 덩어리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주변의 저항을 사게되고 그것은 파멸하게 되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명상수련자는 물질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오로지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곁에 두는 것이다. 고요하고 여여한 내면의 진실만을 지켜나갈 뿐이다. 

 필자는 거의 6년 정도 작은 규모의 친환경 유기농 텃밭을 가꿔왔다. 애초에 대안학교에서의 교육적 목적을 위해 시작한 일이지만 어느덧 아이들도 1평 규모의 작은 텃밭을 가꾸고 나 역시 오밀조밀하게 텃밭을 가꾸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친환경 유기농 텃밭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쌓이기 시작했다.

 '친환경 유기농 텃밭'의 기준은 무엇일까? 농약을 치지 않으면 유기농 텃밭일까? 화학비료를 쓰지 않으면 친환경일까? 아니면 종자까지 직접 관리하여 유전자 조작이 전혀 가해지지 않은 토종종자를 확보해야 친환경 유기농일까? 사람마다 기준은 다르지만 나의 경우에는 일단 농약을 쓰지 않고, 비닐멀칭과 하우스 시설을 설치하지 않는다. 한편 화학비료는 농사를 처음 시작할 때 밑거름으로 한번 주며, 씨앗과 모종은 일반적인 종묘상에서 구입한다.

 

 

 사진에서 보듯이 친환경 유기농으로 농사를 지어도 웬만한 작물은 상당히 우량하고 실하게 자란다. 초반에 밑거름 외에 별다른 퇴비를 쓰지 않고도 작물이 실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요령이 필요하다. 일단 가장 중요한 것은 일조량과 두둑의 높이, 그리고 토질이다. 일단 밭작물은 몇몇 응달진 곳을 좋아하는 작물을 제외하고는 일조량이 높을수록 좋다. 나의 텃밭은 뒤에 산지가 있기 때문에 일조량이 높은 편이 아니다. 하루 중 9시간 정도 햇빛이 들어온다. 

 일조량이 다소 높지 않더라도 토질과 두둑의 높이가 높은 경우 텃밭작물이 매우 잘 자랄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한다. 일단 두둑은 적어도 40cm 이상은 되어야한다. 두둑이 낮을 경우 물빠짐이 좋지 않아 작물이 매우 부실하게 자란다. 또한 두둑이 높은 상태에서 토질의 경우 밭작물이 자라기 좋을 정도로 보슬보슬한 것이 좋다. 그래서 밭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밭에 마사토를 잔뜩 옮겨다 놓기도 하는 것이다. 보슬보슬한 토질이라야 작물이 쉽게 뿌리내리고 줄기와 열매에 에너지를 집중한다. 

 

 위 사진에서처럼 치커리와 아욱이 매우 실하게 성장하였다. 본론으로 들어가 친환경 유기농 텃밭의 장점이라면 뭐랄까... 일단 돈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의 경우는 심지어 비닐멀칭조차 하지 않는다. 호박망도 따로 살 것 없이 지주대로 'A형 텐트' 구조를 만들어 주워다놓은 나무가지를 얹어놓으면 알아서 호박이 잘 기어 올라간다. 그리고 밭의 틀도 주변의 돌로 사용하였다. 시설에 드는 돈은 지주대(하나에 500원 안팎) 뭉텅이와 고추끈이 전부이다. 그리고 초반에 종묘상에서 모종과 씨앗을 사고, 비료를 적당히 사두는 것이 전부이다. 한 50평 정도를 짓는다고 볼 때 1년 농사에 5만원도 들지 않는다. 

 또 한가지 나의 경우 태평농법까지는 아니지만 잡초를 완전히 뽑지 않고 적당히 깔아두는 농법을 하고 있는데, 이것이 좋은 점은 잡초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너그러워진다는 것과 다양한 잡초, 산야초의 더부살이와 공생관계를 탐구하며 생태학습이 된다는 것이다. 비닐멀칭을 하지 않는 노지재배에서는 당연히 잡초가 어마어마하게 자란다. 하지만 이 잡초를 다 뽑아낼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잡초를 아예 뽑지 않으면 당연히 작물이 잡초와의 경쟁에서 패배하여 거의 다 죽어버린다. 그런고로 각 작물의 특성에 맞게 '적당히' 뽑아주고 잘라주는 것이다.

 잡초를 다 뽑지 않고 적당히 잘라주면 좋은점은 잡초가 수분을 머금어 어느정도 천연 비닐멀칭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잡초를 너무 방치하면 텃밭이 너무 습해져서 작물이 질병에 걸릴 위험이 있다. 항상 '적당히'를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며 이는 친환경 텃밭을 짓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경험이다. 

 텃밭에는 씀바귀, 망초, 오행초(쇠비름) 등등 많은 잡초들이 자라지만 이 잡초들은 한편으로는 훌륭한 식재료이기도 하다. 씀바귀는 훌륭한 쌈채류가 되고, 망초는 된장국에 넣어 먹을 수 있다. 또한 쇠비름이나 질경이는 효소 및 나물로 만들 수 있는데 기실 산야초에 대한 지식만 갖추고 있어도 쉐프의 손길에 의해 잡초가 작물로 변신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잡초를 적당히 뽑고 살려두는 농법은 잡초와 작물의 더부살이 과정에서 잡초(산야초)도 식재료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잡초와 작물이 공생하는 친환경 유기농 텃밭은 훌륭한 생태교육의 현장이기도하다. 필자는 앞에서 이야기했듯 대안학교 학생들의 교육적 목적을 위해 텃밭을 가꿔왔다. 밭작물만 덩그러니 있는 밭도 물론 규칙성있고 아름답지만 보다 다양한 생물들의 하모니를 볼 수 있는 텃밭이 교육적으로는 더 좋다. 밭에 다양한 식물과 동물들이 공존하는 모습을 보며 자연과 생태에 대한 관점을 확장할 수 있는 것이다.

 

 친환경 유기농 텃밭의 단점은 생산성이 낮다는 것이다. 기실 비닐멀칭 등 시설도 없고, 화학비료나 농약을 뿌리지 않아 온갓 병충해와 자연재해에 노출된 친환경 유기농 텃밭은 기존의 상업적 농사보다 생산상이 높을 수 없다. 몇몇 유기농업의 고수분들이 친환경 유기농법으로 기존의 상업농사보다 더 실하고 많은 작물을 생산한다는 소문들은 정말 대단한 농사고수들의 이야기일뿐 그 정도의 전문적 식견이 없는 일반인들이 취미삼아 유기농법으로 텃밭재배 하는 것에서는 절대 높은 생산성을 기대할 수 없다. 물론 나와 내 가족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먹고, 차고 남을 만큼 충분한 양의 재배는 되니 걱정말길 바란다.

 

 친환경 유기농법의 또 다른 단점 혹은 주의사항은 바로 병충해와 자연재해이다. 어떤 사람들은 잡초들과 공생하며 자란 작물들은 굉장히 튼튼하고 실하며, 병충해로부터 강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이견이 갈릴 수 있는 주장이다. 안전한 하우스 안에서 병충해를 말살시키는 농약을 뿌리면 당장 질병과 자연재해로부터 상당히 생존확률이 높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 방식이 농작물의 내성을 약화시키고 농장환경을 척박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에 친환경 유기농법 예찬론자들은 장기적 관점에서 질병에 안전함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친환경 유기농 환경에서 '생존해낸' 작물들은 기존의 상업적 농업에 의해 길러진 질소덩어리 작물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튼튼하고 실하게 자라난다. 

 

 

 위 사진처럼 언듯보면 잡초밭 같지만 이곳에서 산마늘과 곰취가 재배되고 있다.

 친환경 유기농법은 무엇보다 '건강하고 안전한 먹거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최대의 장점이자 앞의 모든 장단점을 포괄하고도 남는 친환경 유기농을 고집하는 이유일 것이다. 우리의 몸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먹거리에 있어 건강하고 안전한 음식을 제공한다는 것 이상의 가치가 있을까? 

 자연과 더불어하며, 건강하고 안전한 먹거리를 제공받을 수 있는 친환경 유기농 텃밭을 필자는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비가 오고 굉장히 상쾌한 하늘이 예술인 날~~ 이런 날은 꼭 텃밭을 들러야한다. 온갓 작물과 잡초들이?! 무럭무럭 새파릇하게 자란 모습을 봐줘야하기 때문이다.

 

 이삼일 사이 파와 적겨자는 엄청 컸다. 정말 늣봄 초여름에 비가 한바가지오면 식물은 무슨 동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루아침에 그 모습이 무럭무럭 변한다. 파는 이제 곧 먹어도 되겠다.

 

 아욱 역시 하루아침에 된장국에 끓여먹어도 될 만큼 잘 자랐다. 곧 된장 풀어다가 개운한 아욱된장국을 해먹어야겠다. 그 고소한 식감이 생각만해도 군침이 돈다.

 

 고추에는 지지대를 세워주었다. 텃밭에서 고추를 키우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내 경험상 모종을 들여와 초반부에 물을 최대한 자주 주는 것이다.(거의 매일...) 물을 잘 주면 고추모종은 튼실하게 크지만, 물을 잘 안주면 모종의 생육도 좋지 않고 고추가 지나치게 맵게 자란다. 올해는 물을 많이 주어 쑥쑥 자라고 있다. 이제 꽃도 열렸으니 곧 열매가 맺힐 것이다.

 

 

 

 괴마토 ㅋㅋㅋ 괴물 토마토는 벌써 열매가 맺혔다. 이제 토마토의 생장력은 놀랍지도 않다. 마치 살아있는 괴수처럼 줄기를 마구 뻗으며 잘 자란다.

 

 

 호박도 벌써 동그랗게 맺히기 시작했다. 토마토와 더불어 호박도 심어놓으면 웬만해선 손해보지 않는 작물이다. 정말 열매가 잘 맺힌다.

 

 

 이번에는 호박망 설치를 주변의 나무를 이용하여 해봤다. 일단 지주대를 군용 A형 텐트처럼 뼈대를 만든다. 그리고 그 주변에 나뭇가지를 듬성듬성 쌓아올린다. 보기는 지저분해 보여도 이것이 오히려 흐물흐물한 호박망보다 더 효과적일 것으로 예측해본다. 

 단 마음에 걸리는 것은 소나무와 잣나무 가지를 활용했다는 것이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식물의 생장을 방해하는 성분을 뿜어낸다. 그래서 소나무밭 아래에는 자잘한 식물들이 잘 안자란다. 뭐... 잡초가 안자라주면 고맙겠지만, 호박의 생육에 지장을 미칠까 불안하긴 하다. 그래도 명색이 다른 식물들을 타고 넘으며 자라는 덩굴식물이 설마 다 죽어가는 소나무 가지에서 나오는 성분에 죽을까... 하여 실험해보기로 한다.

 

 

 지금은 듬성듬성 지저분해보여도 한 여름동안 호박과 오이는 엄청나게 커버리기 때문에 이 삼각지주대를 다 뒤덮고도 남을 정도로 무성하게 자랄 것이다.

 

 

 

 오이가 자라는 모습은 정말이지 볼 때마다 앙증맞고 신기하다. 마치 미니어처 오이 같다. 아기 코끼리가 생긴건 완전 어른 코끼린데 덩치만 작아 더 귀여운 것 같은 그 느낌이다.

 

 올 해는 오이도 무척이나 잘 자란다. 다 초반에 물을 자주 주어서 그렇다.

 

 산마늘은 이제 열매를 맺고 잎이 시들시들하다. 올 해는 새로 자리를 잡느라고 산마늘을 하나도 맛보지 못했다. 내년에는 알싸한 산마늘을 맛볼 수 있길 희망한다.

 

 

 그래도 곰취는 여전히 파릇파릇하다. 곰치는 여름 내내 틈틈히 먹어줘야겠다. 잎이 드세져도 그럭저럭 먹을만하다.

 원하는 것을 이루게 하지 못하는 것은 내 내면에 집착하는 감정이다. ‘언젠가는 될거야. 언젠가는 할 수 있을거야. 언젠가는 이곳을 벗어날거야.’ 그놈의 ‘언젠가는’을 통해 우리는 미래의 어느 순간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고 괴롭히고 있다. 하지만 결국 ‘언젠가는’ 이라는 먼 미래를 담보하는 감정과 먼 미래에 대한 집착의 에너지에 우리는 구속한다. 즉 무언가 ‘집착’ 하는 그 감정 자체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결국 원하고자 하는 대상이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집착하는 감정이 목적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될 것이라고 스스로 암시하며, 현재의 집착하는 감정을 되풀이하고 그 것에 빠져있는 것이다.

 

 진정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한다면 지금 당장 해라. ‘Just Do It' 부자가 되고 싶으면 지금 당장 부자가 되라. ’지금 나는 이미 부자다.‘ 라는 생각을 확실하게 가져라. 내가 지금 통장에 잔고가 0원이든, 100만원이든 그 물질 자체는 상대적인 것이다. 누군가에겐 100만원을 가진 것도 부자일 수 있고, 건강한 몸 하나 가진 것도 부자일 수 있다. 내가 부자라 생각하지 않는 것은 단지 나 자신이다.

 

 내가 지금 100만원을 가지고 있는데 나 자신을 부자라 생각한다면 어떻게 행동할까? 100만원자리 핸드백을 사버려 전 제산을 탕진하는 것은 ‘거지 마인드’이다. 100만원을 아끼고 아껴 조금씩 저축하는 것은 ‘서민 마인드’이다. 진정한 부자라면 그 100만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투자하여 200만원으로 불리고, 200만원을 다시 400만원으로 늘리는 최적의 지혜로운 경제활동을 구상하고 적극적으로 실행할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부자마인드’이다. 하지만 내가 가진 100만원의 가치를 모르고 훗날 부자가 될 것이라는 의식에 사로잡혀 그 100만원을 적금통장에 묵혀놓고 하기 싫은 온갖 일을 하며 10만원, 20만원 차곡차곡 모은다면 부자가 되는데 꽤 오랜 시간이 흘러갈 것이다.(그래도 먼 훗날 부자가 될 가능성은 있다.)

 

 중년이여! 자연인이 되고 싶으면 지금 당장 자연인이 되라. 당장 회사를 때리치라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에 텐트와 배낭이라도 넣고 다니며 주말이며 짬이 나는 반나절 동안 자연에 들어가 ‘나는 지금 이미 자연인이다.’ 라고 생각하고 지금 이 순간을 누려라. 자식들 다 분가시켜 놓고, 은퇴하여 연금 받으며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자연이이 될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면 막상 자연인이 된 모든 조건이 갖춰진 순간 주저할 것이며, 매우 허탈할 것이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지금 당장 하라. ‘Just Do It' 이것이 오로지 ’Be yourself'로 가는 지름길이다. 나 자신이 이미 내가 원하는 존재가 되었다 여기고 지금 이 순간부터 원하는 것을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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