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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서의 머리글은 다음과 같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고 명상전문가이기 때문에 이 구절이 기존의 기독교인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

아니, 같은 의미일수도 있겠다... 단지 언어와 개념의 장벽을 거두고보면 모두 같을 것이다.

 

명상도 기독교도 결국 '편협한 개체성'을 초월하여 보다 거대한 '우주의 보편적 초월자'를 향해가는 것이다. 개체성의 부정이 아니라 개체성이 보다 큰 보편법 안에 내제되어 있음을 깨닫는 과정이다. 기독교의 교리는 예수님의 일생을 추적하며 매우 비유적이고 서사적으로 이 원리를 잘 풀어나가고 있다.

 

 

 

 

 

 

요한 복음서를 읽다보면 초반부에 '니코데모와 이야기하다.' 라는 장이 나온다. 

이 구절을 보면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고 내가 말하였다고 놀라지 마라.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이와 같다."

 

 

 *개체적 에고의식의 한계를 지적한 말이다. 우리는 결국 '아무것도 모른다.' 그저 맡기고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 내가 진시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 '하느님의 말씀'  '영원한 생명' 은 개체적 에고의식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개체적 에고의식과 욕망, 집착에 사로잡혀 있음으로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구절은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렇다! '악'과 '지옥'은 자신의 에고의식을 내려놓지 못하는 오만과 탐진치에 있는 것이다. 자신의 에고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이미 '지옥'을 현생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자기자신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우주의 보편적 초월자를 인식하는 자들은 이미 자기 안에 하느님을 본 것이다. 이미 천국을 살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벌을 주고 심판하는 자가 아니다. 이들을 사랑하시어 아들을 통해 '구원' 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또 생각해 볼 거리는 하느님이 선악과 분별심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 '아들'을 내려놓음으로써 또 다른 선악과 분별을 낳은 것이 결국 이 세상의 한계가 아니냐는 것이다. 노자에는 '천지불인' 이라는 말이 있다. 하늘과 땅은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냉정한 모습이 진정 하느님인 것 같기도하다. 

 

 

 

 

 

 여하튼 기독교는 사람으로 하여금 내면에 영원불멸한 '신성' '영성'을 발견하도록 이야기한다. 기독교의 서사와 사건을 있는 그대로 믿는 것은 우매한 것이다. 성경을 읽을 때는 그 서사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핵심적인 '주제의식'을 발견하면서 봐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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