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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영화를 보며 진심 스릴러 공포영화보다 심장이 쫄깃하였다. 일단 배우들의 표정연기는 더 말할 필요도 없는 명연기였으며, 개인적으로 감독인 데이미언 셔젤이 진정 음악을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전공이든 취미든 기악을 다루는 사람은 알거다... 합주연주에서 박자 하나 놓칠 때의 심징 쫄깃함을.... 감독은 그 심장쫄깃한 상황을 스릴러 저리가라 할 정도로 잘 캐치하여 화면에 담아내었고, 재즈합주 중 각종 악기와 악보가 역동적으로 넘어가는 영상기법은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전혀 지루하지 않게 영화를 시청할 수 있도록 유도하였다. 아마 감독이 영상을 담아내는 타이밍센스가 없었다면, 재즈를 모르는 사람에게 상당히 지루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재즈를 아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도 심장이 터져버릴 듯한 폭발력을 특유의 긴장감과  침묵 속에 담아내었다.


 영화가 표현하고자 한 주제의식은 매우 명확하다. 바로 예술가의 광기를 기가 막히게 관객들이 공감하도록 표현한 영화이다. 바로 그 표현력과 평범한듯 폭발력 넘치는 스토리 진행이 영화의 가장 뛰어난 점이다.

 더 완전함, 더 뛰어남... 그 신적인 미학에의 갈망은 모든 예술가들이 공감하는 것이다. 예술이란 사람으로 하여금 무언가 자신을 뛰어넘는 존재를 갈망하게 한다. 손이 물러터져버리든, 인간관계가 단절되든, 온갓 더럽고 치사한 알력싸움의 예술계에서 하루하루 버텨가면서도 그들이 갈애하는 것이 무엇인가! 마치 진흙 속에 피어난 연꽃처럼... 그 아름다운 무언가를,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무언가를 갈망하는 것이다. 그 욕망, 그 광기 앞에서는 선악도 그 어떠한 경계도 무의미하다. 다만 그곳에 도달하였는가만 있다.


 주인공 앤드류도 플레처 교수도 모두 미친 사람이다. 둘은 그 지점에서 닮아있다. 피아의 경계가 없다. 서로에게 상처주고 비하하고, 치사하게 서로를 끌어내리고 파괴시키고... 이 모든 비인간적 행위들은 광기 앞에서 무색해진다. 그저 그 곳에 도달하였는가만 있을 뿐이다.

 결국 영화의 마지막에서 앤드류는 그 곳에 다달았다. 플레처 교수도 만족스럽게 사람을 키워냈다. 마지막 순간을 위해 그 이전에 어떤 파괴적이고 비인륜적 행위들이 있었느냐는 그 순간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영화는 그 이후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앤드류는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탄탄대로를 걷는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되었을까? 음악을 그만두었을까? 아니면 플레처 교수의 옛 제자처럼 심적 불안감과 우울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을 하였을까?

 또한 영화는 관객들에게 묻는다. 당신은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가! 일상의 희노애락과 평화로움에 만족하며 안전한 삶을 살고 있는가? 무언가 끝모를 것을 추구하는 광기를 지닌 삶을 사는가? 아니면 한때 사그라들 불꽃처럼 그 길을 멈추었는가? 혹은 광기 어린 예술가의 삶이 진정 행복하고 사람다운 삶인가?

 영화는 묻지만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는다. 그것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주인공들은 그저 그 길을 추구하였고, 결국 얻어내었다. 그 팩트만 말하고 있다. 그것이 행복인지 불행인지, 옳은지 그른지 어떤 대답도 하지 않고 있다. 질문만 던지기에 더욱 훌륭한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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