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般若波羅蜜多心經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반야심경'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의 줄임말로서, '마하'는 '크다' 혹은 '대승'이며, '반야' 는 지혜를 뜻합니다. '바라밀    다'는 열반의 세계에 도달한다는 뜻으로, 반야심경은 '큰 지혜로 열반의 세계에 도달하는 마음에 새기는 경전'이며, '마    하'라는 의미에서 알 수 있듯 대승불교적인 색채가 있어 대중들이 쉽게 낭독할 수 있도록 아주 짧은 시구에 불교의 '공    사상'을 축약해서 넣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 時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舍利子 色不異空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 시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사리자 색불이공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不垢不淨 不增不減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 味觸法

불구부정 부증불감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 미촉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菩提薩 依般若波羅蜜多 故心無가애 無가애故 無有恐怖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 고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 故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 고득아뇩다라삼약삼보리

 

故知般若波羅蜜多 是大神주 是大明주 是無上주 是無等等주 能除一切苦

고지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일체고

 

眞實不虛故說般若波羅蜜多 주卽說주曰,

진실불허고설반야바라밀다 주즉설주왈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薩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3번

 

우리말 반야심경.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열반에 이르는 지혜)을 행할 때 오온(색,수,상,행,식의 쌓임-물질, 감각, 지각, 의지, 인식)이 다 비었음을 비춰보고 일체 괴로움을 여의었느니라.

사리자여 물질이 허공과 다르지 않아서 물질이 곧 허공이고 허공이 곧 물질이며 감각, 지각, 의지, 인식도 그러니라.

사리자여 모든 법의 공한 모양은 생기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며 더럽고 깨끗한 것도 아니며 늘어나고 줄어드는 것도 아니니라.

그러므로 공한 가운데 물질도 없고 감각, 지각, 의지, 인식도 없고 눈, 귀, 코, 혀, 몸, 뜻도 없으며 형상, 소리, 향기, 맛, 촉감, 법도 없으며 눈의 영역 내지 인식의 영역도 없으며 무명도 없고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없고 늙고 죽음이 다함도 없어서 괴로움, 번뇌, 열반, 수도도 없고 지혜도 없고 얻을 것도 없으니 얻을 것이 본래 없기 때문이니라.

보살이 반야바라밀에 의지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게 되어 뒤바뀐 망상을 여의고 마침내 열반을 이루며 삼세에 모든 부처님도 반야바라밀에 의지하여 위없이 높고 바르고 두루한 큰 깨달음을 이룩하느니라.

그러므로 알라. 반야바라밀은 크게 신력한 주문이며 가장 밝은 주문이고 위없이 높은 주문이며 동등함이 없는 주문이니 모든 괴로움을 없애주고 진실되고 허망하지 않으리라. 이에 반야바라밀다 주를 말하리라.

닿았노라 닿았노라 사바세계를 떠나 저 피안의 언덕에 닿았노라.* 세번

 

 

 반야심경은 읽고 있으면 마치 '없음의 경전' 같습니다. 대승불교에서 강조하는 '공(空) 사상'을 집약한 경전이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반야심경은 '아무 것도 없다'는 허무주의를 말하는 것일까요? 절대 이 부분을 오해하면 안됩니다. 불교의 '공사상'은 역설의 사상입니다. 즉, 모든 것을 다 없애버렸을 때 그 와중에 남아있는 '그 무엇'을 찾고자 하는 철학이지요. 그 무엇보다 확실한 '실존의 철학'인 셈입니다. 

 다 없다~ 없다~하다 마지막 구절에 가면 '큰 깨달음을 이룩하느니라.' '모든 괴로움을 없애주고 진실되고 허망하지 않으리라.' 라는 구절이 백미입니다. 바로 이 구절을 통해 반야심경이 이 세상의 허망함을 한탄한 경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이 마지막 구절을 통해 아무것도 없다는 의문과 절망이 한순간 확 뒤바뀌며 그 무언가가 있음을 직관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서의 머리글은 다음과 같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고 명상전문가이기 때문에 이 구절이 기존의 기독교인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

아니, 같은 의미일수도 있겠다... 단지 언어와 개념의 장벽을 거두고보면 모두 같을 것이다.

 

명상도 기독교도 결국 '편협한 개체성'을 초월하여 보다 거대한 '우주의 보편적 초월자'를 향해가는 것이다. 개체성의 부정이 아니라 개체성이 보다 큰 보편법 안에 내제되어 있음을 깨닫는 과정이다. 기독교의 교리는 예수님의 일생을 추적하며 매우 비유적이고 서사적으로 이 원리를 잘 풀어나가고 있다.

 

 

 

 

 

 

요한 복음서를 읽다보면 초반부에 '니코데모와 이야기하다.' 라는 장이 나온다. 

이 구절을 보면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고 내가 말하였다고 놀라지 마라.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이와 같다."

 

 

 *개체적 에고의식의 한계를 지적한 말이다. 우리는 결국 '아무것도 모른다.' 그저 맡기고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 내가 진시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 '하느님의 말씀'  '영원한 생명' 은 개체적 에고의식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개체적 에고의식과 욕망, 집착에 사로잡혀 있음으로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구절은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렇다! '악'과 '지옥'은 자신의 에고의식을 내려놓지 못하는 오만과 탐진치에 있는 것이다. 자신의 에고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이미 '지옥'을 현생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자기자신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우주의 보편적 초월자를 인식하는 자들은 이미 자기 안에 하느님을 본 것이다. 이미 천국을 살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벌을 주고 심판하는 자가 아니다. 이들을 사랑하시어 아들을 통해 '구원' 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또 생각해 볼 거리는 하느님이 선악과 분별심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 '아들'을 내려놓음으로써 또 다른 선악과 분별을 낳은 것이 결국 이 세상의 한계가 아니냐는 것이다. 노자에는 '천지불인' 이라는 말이 있다. 하늘과 땅은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냉정한 모습이 진정 하느님인 것 같기도하다. 

 

 

 

 

 

 여하튼 기독교는 사람으로 하여금 내면에 영원불멸한 '신성' '영성'을 발견하도록 이야기한다. 기독교의 서사와 사건을 있는 그대로 믿는 것은 우매한 것이다. 성경을 읽을 때는 그 서사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핵심적인 '주제의식'을 발견하면서 봐야한다. 

 

 

 

 20~21세기를 유행한 철학명언을 받아들일때 가장 오해도 많고, 절대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여 오해하면 안되는 용어가 바로 니체의 '신은 죽었다.' 일 것이다. 니체는 그의 명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왜 '신은 죽었다'고 말했을까? 

 

 니체가 '신은 죽었다.' 라는 파격적인 말을 한 이유는 19세기 이전까지 서양문명이 지니고 온 고질적인 '이원론적 세계관'을 망치로 깨부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기독교적 전통을 가진 서양문명은 기묘한 이원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마치 지금 이 땅과 천국이 분리되어 있듯이, 인간의 '신체'와 '정신'을 분리시켜 놓았었다. 인간의 몸과 이 대지의 것들은 한낮 '가짜'에 불과하고, 인간의 합리성에 바탕한 고고한 정신과 영혼, 그리고 천국의 세계만이 오로지 '진짜' 라는 지나친 치우침에 대한 경종이고 망치질이었던 것이다. 즉, 니체의 '신은 죽었다' 라는 표현은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친 서양인들의 사고방식에 균형감각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지 절대 초월자 혹은 초월적 법칙의 신비에 대한 비꼼이 아니었던 것이다. 니체의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이 용어만 들으면 마치 니체라는 사람은 굉장히 오만방자하고 자기애에 가득하며(..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쩝) 미신타파를 외치는 물질주의자처럼 느껴지겠지만 결코 그렇게 니체의 사상은 단순무식하지 않다. 다만 뜨겁고 열정적으로 인간 내면의 주체의식, 실존의식을 건드려 그 열망과 뜨거운 불길로 기존의 인간이 쌓아놓은(서양인이 쌓아놓은) 인식의 장벽을 깨부쉈던 것이다.

 

 이러한 니체의 열정적인 노력은 기묘하게 20~21세기 과학과 문명의 발전과 만나며 이 용어에 대한 이상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마치 '신은 죽었다' 라는 말이 20세기 인간의 눈부신 과학과 문명의 발전에 대한 찬양과 '신'이라는 미신적인 존재에 대한 타파를 이야기하는 구호처럼 들리니 말이다. 니체는 단지 '신'이라고 상징된 '인간의 편협한 인식체계의 한계'를 타파하려 한 것이다. '과학'이 인간정신의 위대함을 저해하는 편협한 신화적 요소로 자리잡는다면 '과학'도 결국 또 다른 '신'이며 이는 죽어마땅한 것이다. 실제로 '과학'은 마치 현대인들에게 '신'처럼 군림하여 모든 가치관을 결정짓고 있지 않는가! 어쩌면 현대인들은 '과학'이라는 '신화'에 사로잡힌 노예일 뿐이다. '신은 죽었다'고 외치지만 니체가 말한 '위버맨쉬(초인)'과는 한걸음 더 멀어져 버린 것이다. 

 

 니체 덕분인지 과학 덕분인지 몰라도 현대인들은 지나치리만큼 '대지'에 충실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지나치게 '신체(나의 몸)'에 충실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죽였던 신을 다시 무덤에서 끄집어내어 살려야 할 판이다.  20~21세기 인류의 길은 번창과 발전의 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과 문명이란 이름으로, 혹은 인간의 오만과 독선으로 '신을 죽였다.' 하지만 신은 결코 인간이 죽인다고 죽는 존재가 아니다. 단지 '사람 안의 신'을 죽였을 뿐이지 이 우주의 여여한 신은 인간 따위가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지금의 문명이 또 다시 엄청난 한계와 재앙에 부딧힐 때 인간은 다시 겸손을 배우고 신을 찾을 것이다. 

 

 니체가 말한 '신'이란 인간의 의식 속에 존재하는 인간을 옭아매는 '인간 의식 속의 신' 이다. 인간이 감히 아직 그 신비를 밝혀내지도 못한 진정한 초월자를 말한 것이 아니다. 다만 인간이 규정지은 '신'이라는 편협한 감옥을 깨버리고, 건강한 자기자신이 되라는 뜻이다. 건강한 나의 두발로 대지를 디디고 섰을 때 인간은 다시금 편견없는 어린아이 같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맑게 하늘을 찬양할 것이다. 그 신비와 거대함을 찬양하며, 즐겁게 '댄스 위드 스카이(Dance with Sky)'할 것이다.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 전에 하신 말씀이다.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고 명상수련을 하는 사람이지만, 이 예수님의 말씀은 큰 울림을 준다. 이는 한 무력한 인간의 절박한 울음에서 순간 그것을 넘어선 영적 깨달음을 고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예수님만큼은 아니지만 각자 삶의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간다. 그리고 누구든 삶 속에서 자기 한계에 부딧히는 절박한 순간을 경험한다. 그것이 거시적이고 인류를 위한 길일수도 있지만, 꼭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사건사고, 관계의 갈등, 사회생활의 버거움, 경제적 어려움 등등 다양한 일상 속에서도 정말 절박한 자기한계에 부딧히기 마련이다. 인간은 이 때 자신이 얼마나 작고 무력한 존재인지 깨닫는다. 중요한 것은 이 순간에 자괴감과 허탈감에 빠져 자신을 망쳐버리는 행위를 하는 것은 진정 타락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가장 어려운 순간이 가장 강력한 영적성장의 순간이다.

 

 모든 일이 순탄하게 잘 풀리는 때, 일상에 지루하게 젓어들어 있는 때는 굉장히 오만방자한 에고의식에 사로잡혀있다. 마치 자신이 자기만의 작은 세계에선 왕이라도 되는 듯이 행동한다. 마치 자신의 삶은 오로지 스스로의 강력한 의지에 의해 뭐든지 조종할 수 있을 것만 같고, 이 세계에 신적인 초월적인 존재나 법칙에 대해서는 비과학적이라는 '고집'으로 애써 무시하고 폄하한다. 말 그대로 고집불통 편견에 가득한 '꼰대'가 되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 우주는 결코 한 사람의 독단과 고집을 방관하지 않는다. 이 독선은 언젠가 많은 것을 잃음으로써(심지어는 목숨까지도) 깨어지게 되어있다. 혹은 남들 보기에는 아주 못되게 살아가면서 뭐든지 다 이룬 삶 같아도 스스로에게는 끝없는 타락과 공허의 한숨만 가득한 삶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과 양심이 그런 삶을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한계가 극에 치달어 결국 초월자의 존재를 찾는다. 삶의 고난과 역경이 자신의 에고의식과 물리적 힘이 뻗치는 범위를 벋어 났을때  겸손을 배운다. 이 때 비로소 자기를 내려놓고 우주의 초월적 법칙에 자신을 맡기는 요령을 터득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적 용어로 '아버지 뜻대로' 하여 아버지의 품에 들어선 것이고, 노장사상의 용어로 '무위자연' 하는 방법을 배운것이다. 태극권의 요결로는 '사기종인'을 터득한 것이며, 불교의 용어로 '공함'을 깨우친 것이다. 인생의 고난과 자기 한계의 끝에 다달어 '자신'을 내려놓고 보다 큰 초월적 법칙에 존재하는 '진짜 자신' 혹은 '초월자 하느님(하나님도 좋고)'을 찾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종교, 철학, 수련이 동일하게 닦아나가는 것이다. 

 

 종교 혹은 명상수행이 인간의 삶에 도움이 되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삶의 역경에 처했을 때, 자신의 한계에 직면했을 때 그것을 내려놓고 더 큰 길로 안내하는 것이다. 종교 혹은 명상수행을 하며 더 작고 편협한 세계로 침잠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진정 종교나 명상을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겸손하고 온화하게 자신을 낮추는 존재가 되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편견과 고집이 없는 어린아이 같이 참되어 가는 것이다. 하지만 더 크고 강력한 내면의 자기자신이 함께 하기에 무엇보다 강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20~21세기 인류의 길은 번창과 발전의 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과 문명이란 이름으로, 혹은 인간의 오만과 독선으로 '신을 죽였다.' 하지만 신은 결코 인간이 죽인다고 죽는 존재가 아니다. 단지 '사람 안의 신'을 죽였을 뿐이지 이 우주의 여여한 신은 인간 따위가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지금의 문명이 또 다시 엄청난 한계와 재앙에 부딧힐 때 인간은 다시 겸손을 배우고 신을 찾을 것이다. 

 

 




 난 수많은 불경 중 가장 드라마틱한 감동을 받는 경전으로 <대반열반경>을 꼽는다. 그 이유인 즉, 인간 부처의 진솔한 고백과 숨결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죽음 직전에 하는 말은 후대에 전해주구 싶은 가장 그 인간의 일생의 정수를 담은 간절한 이야기가 아닐까한다. 부처님은 열반 직전 '방일치 말고 정진하여라.' 라는 말씀을 하셨다. 즉 게으름 부리지 말고 매 순간 깨어있어 정진하라는 뜻이다.

 그 수많은 명언 중 왜 하필 이 심심할 정도로 단순한 잔소리를 하셨을까...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세상 어느 선생님이든 제자에게 모든 것을 쏟아부어 가르쳐주었다면 마지막 순간에 해주고 싶은 유일한 말일 것이다.

 부처님은 병마와 싸우며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슬퍼 말아라 세상 모든 것은 변한다.' 즉 부처 자신의 육신 또한 그 별리의 순리를 거스르지 못한다는 아주 솔직하고 인간적인 고백을 한 것이다. 모든 존재가 덧없이 변화함을, 부처 자신의 육신 또한 그 순리를 거를 수 없음을... 그렇다면 진정한 니르바나란 무엇인가? 어느 순간 니르바나에 도달하였다 하여도 모든 존재는 매순간 변화한다. 그렇기에 모든 존재는 매순간 깨어있음에 게으를 수 없는 것이다. 한순간의 깨달음은 그 순간 끝이다. 변화 앞에서 그 순간 역시 공하게 사라지는 것이다.

 부처님은 니르바나에 대한 신비주의가 없다. 그것은 제자들이 만든 환상일 뿐이다. 부처님은 니르바나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매 순간 깨어 니르바나로 존재하는 지속성이 어려움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진저한 깨달음이란 매순간 깨어 정진해야 하며, 이를 위해 언젠가 자신을 떠날 스승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자등명 자귀의, 법등명 법귀의' 오직 자신을 등불 삼아 가라고 한 것이다.

 이 진솔한 숨결때문인지 대반열반경을 읽을 때면 무언가 스승의 애잔함이 느껴진다.

 

 
 


 누구나 칭찬을 받으면 기분이 좋다. 칭찬을 받음으로써 타인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인정받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결국 타인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함으로써 엄청난 만족과 행복감을 느끼도록 되어있다.

 지나치게 자존감과 자신감이 떨어지는 사람에게 칭찬은 약이 된다. 자신이 하는 일의 동기를 얻게 되고 타인에게 긍정적이고 열린 태도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삶의 열등감과 상처가 많은 사람에게 칭찬은 매우 중요한 치유책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칭찬에 중독되어 버리는 순간 사람의 삶을 망치게 만드는 독이 될 수도 있다. 사실 칭찬은 칭찬을 받는 사람의 실력향상이나 발전에 큰 도움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칭찬을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칭찬을 하는 사람에게 긍정적인 신뢰감을 심어주어 결국 칭찬으로 사람을 지배하는 수단으로도 쓰이게 된다. 칭찬을 받은 사람은 칭찬을 한 사람에게 감사와 신뢰감을 느끼며 자신이 지시받은 일에 강한 동기를 형성하고 일을 열심히 하게 된다. 또한 칭찬을 많이 하는 사람은 덕이 높은 사람으로 칭송받는다. 칭찬은 오너가 교묘하게 부하에게 일을 열심히 하게 만들고 자신을 잘 따르도록 만드는 수단이 된다.

 타인으로부터의 인정과 칭찬에 중독이 된 사람은 자신의 진솔한 내면의 발전에 힘쓰기 보다는 타인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기 위해 타인의 이익을 위한 일에 몰두하게 된다. 그 결과로 타인으로부터 칭찬과 긍정적인 반응을 얻게 되는 만족감에 중독되어 버리는 것이다. 결코 이런 부류의 칭찬에 중독되어서는 안된다! 사실 사회에서는 이런식으로 교묘하게 칭찬을 활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로 재정이 열악한 작은 진보단체나 시민단체에서 오래 근무하는 사람들 중에 '칭찬중독자' 들이 많다. 이들의 특징은 기본적으로 자존감이 떨어지고 열등감이 매우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재정이 열악한 작은 단체이다보니 이들이 열심히 일한 노동의 대가를 '칭찬과 치켜세우기' 와 같은 정서적 만족을 주는 피드백으로 보상해준다. 자존감이 떨어지고 열등감이 많은 만큼 이러한 칭찬에 쉽사리 중독이 되어버리고, 자신의 한 몸을 활활 불태워 단체를 위해 희생하게 된다.

 하지만 그 결과가 과연 그 사람 자신에게 충만하고 윤택한 삶의 이익을 가져다줄까?  잘못되면 칭찬에 이용만 당하다 몸도 상하고 노동에 대한 정당한 금전적 보상도 못받고 퇴직을 하거나(혹은 단체가 와해되어 버리거나...), 혹여 그나마 잘 된다 하더라도 작은 단체의 수장이 되어 그 작은 세계안에 파뭍힌 꼴불견의 독불장군이 되어버린다. 자신을 치켜세워주는 작은 세계에 중독되어 스스로 뭔가 매우 위대하고 우수한 존재가 되었다는 착각에 사로잡혀 그 작은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 세계를 조금만 벗어나봐도 알 것이다. 자신을 의도적으로 칭찬해주었던 사람들이 아닌 더 넓고 냉정한 세계 속에서 자신은 별 특별한 능력도 재능도 없는 사람이라는걸... 단지 칭찬에 물들어 자신이 뛰어나다는 착각에 빠져 우물 안에서 고여버린 개구리 한마리만 있을 뿐이다.)
 



 사실 냉정한 평가와 쓴소리, 노동에 대한 정직한 금전적 보상이 귀에 달달한 칭찬보다 훨씬 사람을 건실하게 성장시킨다. 노동에 대한 이 세상 어느 무엇보다 훌륭한 보상은 단지 그에 따른 정당한 금전적 보상이다. 그 외에 인간적인 정서를 충족시켜주는 칭찬이나 치켜세움에 절대 자신의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팔아버리지 말라.

 칭찬보다 냉정한 평가와 쓴소리를 하는 사람을 따라라. (물론 평가와 쓴소리를 넘어 비하와 욕설을 하는 사람을 따르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래야 자신의 세계가 넓어진다. 자신만의 작은 상아탑을 세워 타인의 냉정한 평가를 차단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위이다. 항상 자신이 낮은 위치에 서서 스승을 찾아야한다. 자신에게 쓴소리를 해 줄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주변에 부딧히고 지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나, 정작 주변에 이런 관계가 없거나 이런 관계들을 차단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가망없는 부류들이다.

 칭찬에 중독되지 말라. 타인의 칭찬에 이용당하지말라. 타인의 달콤한 칭찬에 이용당하며 자신의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희생하지말라. 이는 순간 자존감이 충족되는듯한 착각에 빠지나 결국 자신을 좀먹을 뿐이다. 진정 스스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가치를 증진시키는 일이 무엇인지 신중하게 판단하여 그것에 몰두하여야 한다. 오직 스스로를 사랑하라. 스스로를 사랑할 때 타인의 칭찬이라는 올가미에 걸리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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