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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과 종교는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진리를 탐구하는 훌륭한 인류의 문화유신이지만 때로는 이와 같은 인식의 오류 때문에 편협한 길을 걷게 된다.

 "과학은 검증할 수 없는 것을 부정해버리고, 종교는 증명할 수 없는 것을  단정지어버리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과학이 가장 가장 파워풀한 논리는 바로 '증명과 검증'이다. 과학의 이론은 모두 검증되지 않으면 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어떤 인류의 문화유산보다 신뢰가 간다. 하지만 과학의 근본이 된 경험주의 철학은 본래 검증할 수 없는 것들에는 '침묵'하는 것이지 결코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침묵과 부정이란 정말 큰 차이가 있다. 침묵한다는 것은 아직 알 수 없는 신비로움에 대한 존중이다. 다만 아직 검증할 수 없기에 판단을 중지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검증할 수 없는 신비를 부정해버리면 모든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편협한 생각의 감옥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과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정말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알 수 없는 신비에 침묵하여야한다. 하지만 절대 이를 부정하여서는 안된다.

 과학과 반대로 종교는 검증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단정지어 버린다. 신, 하나님, 온갓 신비로운 우주의 법칙과 초능력.... 이런 것들에 대해 너무 쉽게 그 존재를 단정해버리고 우상을 만들어 버린다. 이는 자칫 매우 우매한 길로 빠질 수 있는 것이다. 평생에 걸쳐 믿어온 것이 어느 누군가의 뇌속에서 일어난 망상이었다고 생각해보라... 정말 비참할 것이다. 그런데 종교에서는 이런 일이 너무 쉽게 허용되고 있다. 종교적 설화와 교리들의 상당수가 검증할 수 없는 무언가를 카리스마적 교주들에 의해 단정지어져 버리고 이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무리들에 의해 믿어져버린다.
 
 결국 종교와 과학 모두 검증할 수 없는 신비에 대해서는 침묵해야한다. 단정도 긍정도 부정도 아닌 침묵, 오로지 이 침묵만이 진리에 이르는 가장 신중한 자세이다.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 전에 하신 말씀이다.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고 명상수련을 하는 사람이지만, 이 예수님의 말씀은 큰 울림을 준다. 이는 한 무력한 인간의 절박한 울음에서 순간 그것을 넘어선 영적 깨달음을 고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예수님만큼은 아니지만 각자 삶의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간다. 그리고 누구든 삶 속에서 자기 한계에 부딧히는 절박한 순간을 경험한다. 그것이 거시적이고 인류를 위한 길일수도 있지만, 꼭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사건사고, 관계의 갈등, 사회생활의 버거움, 경제적 어려움 등등 다양한 일상 속에서도 정말 절박한 자기한계에 부딧히기 마련이다. 인간은 이 때 자신이 얼마나 작고 무력한 존재인지 깨닫는다. 중요한 것은 이 순간에 자괴감과 허탈감에 빠져 자신을 망쳐버리는 행위를 하는 것은 진정 타락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가장 어려운 순간이 가장 강력한 영적성장의 순간이다.

 

 모든 일이 순탄하게 잘 풀리는 때, 일상에 지루하게 젓어들어 있는 때는 굉장히 오만방자한 에고의식에 사로잡혀있다. 마치 자신이 자기만의 작은 세계에선 왕이라도 되는 듯이 행동한다. 마치 자신의 삶은 오로지 스스로의 강력한 의지에 의해 뭐든지 조종할 수 있을 것만 같고, 이 세계에 신적인 초월적인 존재나 법칙에 대해서는 비과학적이라는 '고집'으로 애써 무시하고 폄하한다. 말 그대로 고집불통 편견에 가득한 '꼰대'가 되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 우주는 결코 한 사람의 독단과 고집을 방관하지 않는다. 이 독선은 언젠가 많은 것을 잃음으로써(심지어는 목숨까지도) 깨어지게 되어있다. 혹은 남들 보기에는 아주 못되게 살아가면서 뭐든지 다 이룬 삶 같아도 스스로에게는 끝없는 타락과 공허의 한숨만 가득한 삶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과 양심이 그런 삶을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한계가 극에 치달어 결국 초월자의 존재를 찾는다. 삶의 고난과 역경이 자신의 에고의식과 물리적 힘이 뻗치는 범위를 벋어 났을때  겸손을 배운다. 이 때 비로소 자기를 내려놓고 우주의 초월적 법칙에 자신을 맡기는 요령을 터득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적 용어로 '아버지 뜻대로' 하여 아버지의 품에 들어선 것이고, 노장사상의 용어로 '무위자연' 하는 방법을 배운것이다. 태극권의 요결로는 '사기종인'을 터득한 것이며, 불교의 용어로 '공함'을 깨우친 것이다. 인생의 고난과 자기 한계의 끝에 다달어 '자신'을 내려놓고 보다 큰 초월적 법칙에 존재하는 '진짜 자신' 혹은 '초월자 하느님(하나님도 좋고)'을 찾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종교, 철학, 수련이 동일하게 닦아나가는 것이다. 

 

 종교 혹은 명상수행이 인간의 삶에 도움이 되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삶의 역경에 처했을 때, 자신의 한계에 직면했을 때 그것을 내려놓고 더 큰 길로 안내하는 것이다. 종교 혹은 명상수행을 하며 더 작고 편협한 세계로 침잠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진정 종교나 명상을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겸손하고 온화하게 자신을 낮추는 존재가 되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편견과 고집이 없는 어린아이 같이 참되어 가는 것이다. 하지만 더 크고 강력한 내면의 자기자신이 함께 하기에 무엇보다 강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20~21세기 인류의 길은 번창과 발전의 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과 문명이란 이름으로, 혹은 인간의 오만과 독선으로 '신을 죽였다.' 하지만 신은 결코 인간이 죽인다고 죽는 존재가 아니다. 단지 '사람 안의 신'을 죽였을 뿐이지 이 우주의 여여한 신은 인간 따위가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지금의 문명이 또 다시 엄청난 한계와 재앙에 부딧힐 때 인간은 다시 겸손을 배우고 신을 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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