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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전을 이야기 하기가 매우 난감한 이유는 분명 수련을 하는 사람에게는 단전자리가 느껴지는데, 일반인들에게는 느껴지지도 않고 또한 해부생리학적 기관(Organ)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수련을 하는 사람들의 주관적 착각에 의해 만들어진 난해하고 몽매한 환상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경험적으로 검증되지 않는 것을 잘 안 믿는 성향이 있다. 그래서 처음 태극권 수련을 접할 때 내적 갈등이 있었다. 태극권의 특유의 몸짓과 그것이 내포한 도가철학의 매력 때문에 태극권을 수련하였지만 '기'니 '단전'이니 '소주천' 따위의 말들을 잘 믿지 않았었다. 왜냐하면 초심자였던 나에게 그런 감각들이 느껴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련이 무르익어감에 따라 몸의 열감이나, 자기장 혹은 물줄기 같은 기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단전의 느낌이 확연해지면서 다시금 내적 갈등이 시작되었었다. 분명 내 주관적 감각으로는 느껴지지만 이것을 경험적, 과학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왜 그런 갈등을 하였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인체란 질량을 가진 에너지 덩어리이다. 또한 인체는 끊임없이 순환하며 창조와 파괴의 재생산이 이뤄진다.  자연히 중력, 전자기장, 혈압, 근육 등 다양한 에너지와 물리적 흐름으로 가득하다. 수련이란 이러한 에너지의 흐름을 섬세하게 자각하고, 이를 컨트롤 해가는 과정이다. 마치 비가 내리면 하천이 생기고, 바람에는  지형의 특성을 반영한 방향이 있으며, 사람이 다니는 길에는 도로가 나듯 인체도 특정한 운동방향에 따라 에너지의 일관된 흐름이 생긴다. 그것을 경락이라고 하는 것이다.

 마치 하천과 하천이 모여 저수지가 되고 바다가 되듯, 도로와 도로가 모여 결절지가 되고 도시가 생기듯, 인체의 에너지도 들고 나는 곳이 집중되는 지역이 생기는데 이를 단전이라 하는 것이다. 대게 인체의 물리적 에너지가 집중되는 곳이 하단전, 인체의 순환적 에너지가 집중되는 곳이 중단전, 인체의 정신적 에너지가 집중되는 곳이 상단전이다.

 하단전이 위치한 곳 주변에는 허벅지, 고관절, 생식기, 창자가 있다. 이들은 근력의 형성, 소화와 배설, 생식 등 인체의 물리적 영역을 담당한다.
 중단전이 위치한 곳 주변에는 심폐와 간위가 집중하여 인체의 순환적 영역을 담당한다.
 상단전이 위치한 곳 주변에는 뇌와 눈이 집중하여 인체의ㅣ 정신적 영역을 담당한다.

 단전은 '에너지 감각'이다. 에너지의 형태와 역할에 따라 그것이 집중되는 곳이 있기 마련이고, 그 부분을 '감각' 하는 것이다. 단전을 인체의 기관이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단전은 '감각'이다.



명상은 그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이루려, 무엇을 해내려 할 것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 그 순간 가장 맑고 행복한 명상이 이루어 집니다.

현시욕(Vanity)이란 자신을 스스로가 가진 것 이상으로 드러내어 보여주려는 욕구이다. 자존감이란 자아존중감, 즉 자기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이다.(흔히 자존감과 자존심을 대비하여 말하지만 사전적 의미로 자존감과 자존심은 같은 뜻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부정적 의미의 '자존심'은 본래 현시욕이라는 용어가 맞다.) 자존감과 현시욕은 일종의 반비례 관계를 가진다.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현시욕이 강한 사람들은 겉보기에는 상당히 강하고 당당하며 화려해보이지만, 사실 내면에는 굉장한 열등감과 자기 학대로 가득 차있다. 하여 매사에 자신을 과도하게 드러내려 노력하며, 타인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인정받으려 애쓴다. 그러는 한편 타인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지니며 은연 중에 다른 사람을 낮추거나 뒷담화를 하는 습관이 있다.

 현시욕은 자존감의 부재에서 나타난다.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볼 줄도 사랑할 줄도 모르기 때문에 항상 내면적으로 공허하고 그 빈 자리를 타인의 치켜세움과 인정으로 보상 받으려 한다. 하여 자기를 학대해서라도 타인으로부터 인정 받는 것을 최우선으로 한다.

 자존감이 강한 사람은 굳이 타인의 인정과 치켜세움에 목말라 있지 않다. 무엇보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기에 자기를 학대해가면서 타인의 욕구와 가치를 충족시켜줘야 할 필요를 못 느낀다. 또한 타인의 비난으로부터도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다.

 현시욕이 강한 사람과 자존감이 강한 사람 중 어떤 사람이 사회적 성공을 거둘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때로는 현시욕이 강한 사람이 특유의 투쟁적 성격으로  사회적 성공에 유리할 수도 있고,자존감이 강한 사람이 특유의 긍정 에너지로 사회생활에 유리할 수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스스로가 느끼는 삶의 만족도에 있어서는 당연히 자존감이 강한 사람이 높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존감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것은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데서 시작할 수 있다. 자존감의 핵심은 '자기 사랑'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지 못한다. 왜 자기를 사랑하지 못할까? 그 이유는 정작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존재인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보통은 자기자신에게 동화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을 객관적 시각에서 보지 못한다. 대게 자신과 동화되어 있다보면 스스로에게 어색함 또는 추악함과 자기 멸시를 느끼기 쉽다. 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라. 그들도 자신과 같은 추악한 단면들이 있을 테지만 한 발 떨어져 볼 줄 알기 때문에 그마저도 쉽사리 이해하고 감싸주며 사랑하는 것이다. 자기 사랑의 비법은 이처럼 자기 자신을 한 발 떨어져 객관적으로 보는데 있다.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면 연민과 애정이 생긴다. 그 동안 그 힘든 길을 꿋꿋히 걸어온 자신에 대한 동정과 사랑이 생기는 것이다.

 자기 사랑의 감정이 싹트기 사작하면 무엇보다 스스로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의 품이 생긴다. 자기 자신을 가장 소중한 인생의 동반자로 여기는 일종의 애틋함이 생기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방법에는 바로 명상이 있다. 명상은 스스로의 에고 의식을 잠재우고, 내면의 객관적, 보편적 자아와 만나는 것이다. 나와 세계에 대한 더 확장된 시각을 가질 수 있도록 한다. 에고의식과 스스로를 동질화시켰던 일상에서 에고의식과 '진짜 나' 를 분리해보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여 명상은 자존감을 높히는 매우 유용한 도구가 된다.

 

명상수련을 하다보면 유독 집중이 안되고 힘든 날이 있죠?

에휴~~ 이걸 해서 뭐하나... 이런 푸념도 들고요.

 

그럴 때는 넓은 자연으로 나가서 화창한 봄날의 꽃들을 바라보세요.

꽃들은 바로 그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꽃에게서 배워보세요.

그 찬란하고 영롱한 한떨기 꽃들을 보고 있자면 이들은 이미 성자임을 알 것입니다.

그저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 큰 스승님 곁에 있는 것처럼 배움이 찾아들곤 합니다.

 

그저 꽃을 바라봄도 훌륭한 명상입니다.

 

 

 

 

 

 

 

 

 

 

1. 호흡명상? 단전호흡?

 

 명상에는 여러가지 명칭이 있지만 호흡명상과 단전호흡이라는 개념에 대해 햇갈리기도 한다. 호흡명상이란 호흡이 드나드는 감각에 집중하고, 호흡을 봄으로써 의식이 현재에 머무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복잡한 잡념을 제거하여 정신적 에너지를 정돈하는 것이다. 호흡명상은 불교에 그 전통을 두고 있다. 부처님께서 힘든 고행의 시간을 거쳐 우유죽을 먹고 몸을 회복한 뒤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호흡명상을 하며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단전호흡은 호흡의 드나듦이 단전과 공명하여 인체의 물질적, 순환적, 정신적(정 기 신)에너지를 함께 키워주는 수련이다. 단전호흡은 주로 동북아시아의 선도(仙道)수련에 그 전통을 두고 있다. 선도란 말 그대로 신선이 되는 수련이다. 수련을 통해 에너지를 양생하여 불로불사의 신선이 되고자 하는 목적을 둔다.

 하지만 이 두가지를 꼭 구분지을 필요는 없다. 단전호흡에도 호흡수련의 정신적 요소가 매우 중요하고, 호흡수련을 하다보면 단전의 느낌이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2. 왜 꼭 호흡일까?

 

 옛부터 해왔기에 맹목적으로 수련을 신뢰하기 보다는 명상의 수단으로 호흡을 활용하는 이유에 대해 궁금해 할 필요가 있다. 호흡을 활용하는 이유는 호흡은 '늘 존재하기' 때문이다. 호흡은 생명이 다 하는 순간까지 현재 이 순간에 존재한다. 매 순간 존재하는 것이 호흡이다. 또한 호흡은 인체에서 가장 명확한 감각 중 하나이다. 여타 다른 감각들은 불분명하거나 일정하지 않다. 하지만 호흡은 인식하면 매우 명확하게 느껴지는 감각이며, 항상 일정하게 컨트롤 할 수 있다. 그렇게 때문에 명상의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3. 호흡명상 시작전 해야할 일

 

1) 몸을 충분히 이완한다.

   호흡에는 흉식호흡과 복식호흡이 있다. 그리고 복식호흡보다 아래로 내려가는 단전호흡이 있다. 흉식호흡은 폐 주위의 갈빗대를 통해 횡경막을 수축이완 시키는 것이며, 복식호흡 및 단전호흡은 복부와 허리를 통해 횡경막을 수축이완 시키는 것이다. 

    수련을 함에있어 흉식호흡의 문제점은 흉식호흡은 상체의 어깨와 가슴을 경직시킨다는 것이다. 어깨와 가슴이 경직되어 버리면 폐와 심장도 경직된다. 폐와 심장이 경직되면 심기가 불편해지고 정신이 산만해진다. 반면 복식호흡 및 단전호흡은 어깨와 가슴을 편안히 이완시켜준다. 심폐가 편안히 이완되어 심기가 편해진다.

   한마디로 호흡은 내리는 것이 좋다. 하지만 호흡은 절대 억지로 내리려해서는 안된다. 호흡은 몸을 편안히 이완하고 풀어줌으로써 자연스럽게 내리는 것이다. 몸이 편안히 이완된 자연상태에서 몸은 복식호흡을 한다. 하지만 몸의 건강을 잃고 몸의 각 부분이 경직됨에 따라 점차 흉식호흡의 비중이 높아지는 것이다.

  호흡을 아래로 내리기 위해서는 몸을 편안히 이완하는 몸수련을 하길 추천한다. 태극권, 요가 등 다양한 몸수련이 있으며 각 지역사회의 올바른 이해를 가진 스승을 찾아 가르침을 받으면 좋다.

 

2) 척추, 등줄기를 바르게 정렬한다.

   척추를 허리에 힘을 주어 꼿꼿하게 피는 것이 정렬이 아니다. 정수리를 세우고 꼬리뼈를 내리고 어깨와 허리에 힘을 빼면 척추가 펴진다. 척추가 펴져야 배와 허리축이 이완되어 깊으면서도 편하게 호흡을 할 수 있다.

 

 

4. 호흡을 억지로 조종하면 안된다.

 몸이 편안이 이완되고 척추가 바르게 정렬하면 편안히 있어도 호흡은 저절로 바른 길로 운행한다. 절대 호흡은 조종하려고 하면 안된다. 호흡은 그저 관찰하고 감각하는 대상이다. 의식을 현재의 호흡에 두는 것, 그것이 호흡명상의 핵심이다. 하지만 호흡을 억지로 조종하여 몸의 편안함이 깨지면 호흡명상은 실패한다.

 

5. 잡생각이 들 때

 호흡명상을 하다보면 잡생각이 난다. 잡생각이 나면 잡생각이 나있음을 자각하고 다시 호흡으로 의식을 돌린다. 이 과정을 무수히 반복하는 것이 수련이다. 매 순간 완벽하게 명상이 되려는 욕심을 버려야한다. 그렇게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하다보면 어느 순간 가랑비에 옷젓듯이 수행의 성과가 찾아온다. 수행의 성과는 고요함과 편안함이다. 에고의식의 혼란함을 벗어나 고요함과 편안함을 찾는 것이 수행의 성과이다. 이것이 호흡명상 중간과 일상에서 보다 잣은 빈도로 깊은 느낌으로 찾아온다면 수행을 잘 하고 있는 것이다.

 

6. 몸의 다양한 감각이나 현상들이 찾아올 때

 호흡명상을 하다보면 열감이 퍼진다거나 단전의 느낌이 충실해진다거나, 혹은 심상에 광명이 일어나고 환희에 차는 등의 현상이 일어난다는 체험담들이 있다. 이 때 주의할 점은 그러한 감각이나 현상은 긍정도 부정도 신비주의화도 아닌 그저 관찰하고 바라봐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양한 감각이나 현상들을 신비주의적으로 해석하려 들거나, 긍정 혹은 부정하는 것은 결국 에고의식을 키우는 것이다. 호흡명상은 에고의식을 잦아들게 하여 몸과 마음에 편안함과 고요함을 깃들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그런데 본말전도되어 자의식만 키워버리면 사람이 미쳐버린다. 명상수련이 거꾸로 가는 것이다.

 

 


 쉬는 것이란 무엇인가? 말그대로 푹~~ 쉬는 것이다. 그런데 우습게도 현대인들은 정말 쉴 줄을 모른다. 꼭 시간이 없어서 못 쉬는 것이 아니다. 쉬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다. 술과 담배에 취한 밤, 고작 반나절 자연캠핑을 하기 위해 꽉 막히는 고속국도에서 보내는 스트레스 가득한 시간들... 쉬어도 쉰것 같지 않고 오히려 일할 때보다 쉴 때 몸이 더 망가질 뿐이다.

 쉴 때 기껏 열심히 일해 번 돈으로 미친듯이 쇼핑을 하고, 술을 퍼마시며 보내는 패턴은 왜 일어날까? 우리는 힘든 일을 하며 엄청난 보상심리를 기대한다. 열심히 일한 만큼 미친듯이 써버리고, 양질의 지방과 단백질과 알콜을 마구 섭취하고 싶어진다. 이는 매우 말초적이 뇌의 신호이자 습관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는 악순환의 반복을 초래한다. 쉼의 순간에는 몸의 소리를 들어야하고, 꽉 차버린 뇌와 감각의 신호들을 충분히 정리해주어야한다. 나의 몸과 정신을 체계적으로 교통정리 해주어야한다. 일을 하며 쌓여버린 교통체증을 쉼을 통해 해소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쉬면서 무리한 소비생활과 술담배에 찌들어 있다보면 교통체증이 과중되고 어느 순간 몸과 마음의 병으로 비화할 뿐이다.




 명상은 우리의 몸과 마음에 교통정리를 해주는 것과 같다. 순간순간 틈틈히 명상을 하며 몸과 마음을 교통정리 해보자. 스트레스가 줄고 매사에 활력이 생기며 긍정적인 정서가 늘어난다. 교통정리가 잘 되어 몸과 마음의 각 부분이 소통이 잘 되고 해소되기 때문이다. 그렇게되면 소비에 대한 과도한 욕구도 자연히 줄어든다. 굳이 그렇게 파괴적으로 보상을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명상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몇가지의 원리원칙만 알고 이를 습득하기 위한 반복적인 훈련만 거치면 내 몸을 살피고 몸의 물질적, 정신적 에너지를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된다. 주말이나 혹은 쉬는 시간 틈틈히, 잠들기 전 나의 몸과 마음을 교통정리 해줄 수 있는 체계적인 시스템을 마련하라.


 명상을 할 때 목적을 분명히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명상의 목적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자칫 매우 공허한 시간낭비가 되거나 추상적이고 삿된 망상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명상의 목적에 '깨달음'과 같이 매우 추상적인 이유를 둘러댄다. 하지만 '깨닫기 위해서' 라는 표현은 매우 위험한 목적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반문해보자. '무엇을 깨닫고 싶은 것인가?' 명확한 목적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무엇을' 에 대한 명쾌한 답을 가지고 있어야한다. 깨닫고 싶은 것이 특정한 기술 혹은 예술이나, 인간관계에서 마음의 고통이 없이 편안해지는 것 등 구체적이라면 좋고, 혹은  '우주의 기원' '생명의 기원' '영생불사의 비밀'과 같이 지나치게 거대한 주제여도 상관없다. 그 주제의 스케일을 비판하고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무엇을' 깨닫고 싶은지 목적의식을 분명히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기실 현대인들이 숭상하는 과학 역시 궁극적으로는 우주의 보편이론, 영생불사의 비밀이라는 목적으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 주제의식이 터무니없다고 비판할 일은 아니다.)

 또는 '해탈' 이나 '초월자와의 합일'과 같은 다소 종교적일 수 있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 자체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다만 진정으로 그것을 얻고 싶은 것인지 스스로 철저하게 확인해봐야한다. 공식적으로 해탈 혹은 초월자와의 합일을 하였다고 전해지는 부처, 예수와 같은 존재들은 이를 얻기 위해 수많은 수련과 고행을 거쳤다. 이 정도의 헌신과 노력을 할 자신은 있는지, 자신이 진정으로 얻고자하는 경지인지 솔직하게 물어봐야한다. 단지 남들보다 튀고 싶거나 우월해보이고자 하는 건 아닌지, 현실을 도피하고자 하는 핑계거리는 아닌지 잘 확인해봐야한다. 이에 대해 분명한 자기확신이 있다면 명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중요한 목적이 될 수 있음에는 분명하다.



 그 외에도 명상을 통해 몸과 마음의 편안함을 얻고 싶은 것인지(힐링과 치유),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설계하고 집중력이나 창의력 같은 삶에 유용한 정신적 능력을 얻고 싶은 것인지 명상을 통해 얻고자 하는 목적이 분명해야한다. 그 이유는 명상이라 칭해지는 행위들은 매우 다양한다. 명상의 방법론은 다양한 것이다. 하지만 명상이 실제적으로 목적에 따른 효과가 분명한지 명확한 증거가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많은 사람들에 의해 임상적 결과가 있거나 뇌파나 몸의 전자기파를 측정하는 다양한 시도들을 하였지만 명상의 효과가 보편적으로 확실한 것인지 많은 연구가 필요한 것은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목적을 매우 분명히 가져야한다. 목적이 분명하면 방법론에 대한 진단이 명확해진다. 목적이 분명할 때 어떤 방법을 사용했더니 그 목적을 성취하였거나 성취하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명확한 피드백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목적이 분명하지 않다면 그 방법론이 진정 옳은 것인지 무언가 자신에게 맞지 않거나 잘못된 방법인 것인지 진단조차 불가하기 때문에 졸지에 시간과 돈을 낭비하고 상당히 허무맹랑하고 공허한 결과를 얻을 수도 있는 것이다.

 명상의 목적이 분명할 때 방법론에 대한 명확한 진단이 가능하고, 스스로에게 생산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농구의 신 마이클 조던, 애플의 스티브잡스, 오프라 윈프리, 헐리우드 영화계의 거장 클린트 이스트우드, 그리고 전설적 영화배우이자 정치인 아놀드 슈워제네거, 현대 대중음악의 전설 비틀즈까지... 위에서 언급한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많은 위인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명상을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명상은 구글과 IBM 등 실리콘벨리의 수많은 기업들이 직원들을 위해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있다. 아직도 명상을 신비주의에 휩싸인 종교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매우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많은 '핵인싸'들이 명상을 해온 것일까? 이들 그룹의 공통점은 사회적인 자본과 명예, 그리고 권력을 거머쥐었다는 점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를 거머쥐기 위해 굉장히 많은 내적 외적 스트레스를 감내해야 했을 것이고, 그 와중에도 비범한 집중력과 인내심 그리고 창의력을 발휘해야 했다는 것이다. 이들 모두 실력으로 각자 분야의 정점에 선 인물들이기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과연 이들이 타고난 유전적, 환경적 요소들에 의해 그런 능력들을 가질 수 있던 것일까? 일단 기본적으로 그 분야에 타고난 자질이 있었음은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라.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타고난 재능 한두가지 쯤은 있지 않은가? 다만 그것을 찾고 계발하지 못한 이유가 더 클 것이다. 명상은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찾도록 도와주며, 집중력과 창의력, 그리고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하여 과업을 성취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방법론'이다. 명상 그 자체는 어떤 종교적 '목적'을 가진 행위가 아니다. 삶을 보다 가치롭고 효과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방법론이다.



 명상은 '진짜 자신'을 찾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편견없는 '진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바로 이 '시점'의 전환이 명상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생각(에고의식)'이 진짜 자신이고, 세상이라 착각하고 산다. 하지만 모두 자신의 '생각'일 뿐 그것이 진짜 세상은 아니다. 예를 들어 길을 걷다 어떤 아저씨와 부딧히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날따라 기분이 매우 안 좋은 날이어서 그 아저씨가 슬쩍 쳐다보고는 그냥 가버리자 '저 아저씨는 정말 인격이 더럽고 못된 인생 패배자야. 짜증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 속에 그려진 그 '아저씨'가 진짜 그 사람일까? 물론 더 나쁜 사람일 수도 있고, 아주 좋은 사람일수도 있다. 다만 그 아저씨에 대한 판단은 할 수 없는 것이다. 아니, 아예 할 필요가 없는 불필요한 생각일 뿐이다. 그 진짜 생각도 아닌 것에, 그 감정의 올가미에 자신을 묶어두어 한 십분 정도는 계속 자신의 머리 속에서 소설을 쓰며 '아저씨'를 미워하는데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할 것이다. 하지만 이 마저도 미워하고 있는 대상은 '아저씨'가 아니라 잔뜩 화가 나서 미워하고 있는 자신의 감정을 미워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가? 단편적인 예를 든 것이지만 사실 삶의 대부분이 이와 같은 현상에 묶여있다. 자신이 진짜라 생각하고 골똘하고 고민하며 스트레스 받고 마음 쓰는 대부분의 것들은 허상이다. 그 허상에 엄청난 양의 에너지와 뇌용량을 소비하고 살고 있는 것이다. 명상이란 이런 비효율적인 오류를 걷어내는 방법이다. 만약 제대로 된 명상을 실천하여 이 비효율적인 오류를 성공적으로 걷어낸다면 그 반대로 엄청난 양의 에너지와 뇌용량이 확보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에너지와 용량은 자연스럽게 집중력과 창의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명상은 자신을 리부트 하는 것이다. 불필요하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뻗은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을 걷어내고 마치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자연상태로 돌려놓는 것이다. 편견과 고정관념에 휩싸여 있을 때는 오히려 삶의 효과적이고 현명한 판단을 하지 못한다. 또한 그 편견이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가로막기도한다. 자신 안의 편견과 고정관념을 걷어냄으로써 삶에 있어서도 보다 분명하고 지혜로운 판단을 할 수 있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생산할 수 있다.

 명상은 또한 자존감을 높혀준다. 자존감이란 자아존중감이다. 자존감과 자존심은 차이가 있다. 대게 자존감이 낮을 경우 자존심이 높다. 그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학대하고 혹사시키는데 이는 자신에 대한 존중감이 떨어지기 때문에 자신이 욕망하는 대상을 성취하고 타인에게 인정 받음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보하려는 몸부림이다. 하지만 명상은 자신의 에고의식이 만들어낸 자아상을 내려놓도록 도와준다. 또한 그럼으로써 어느 정도 자신을 객관화하여 바라보게 해준다. 자기 사랑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을 객관화해서 바라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점과 에고의식이 동일시되어 버리면 자기를 바라보지 못한다. 한번도 본적 없는 대상을 어찌 사랑할 수 있겠는가? 자신을 객관화해서 바라볼 때 사랑스럽고 연민도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자기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스스로를 존중할 수 있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바라본 대상은 보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존중할 수 있다. 이렇게 스스로를 객관화함으로써 사랑하고 존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존감이 높을 때 삶을 주체적이고 분명한 목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자존감이 떨어지는 사람은 항상 타인의 기대와 사회적 욕망에 스스로를 끼워 맞추려 하지만 정작 스스로는 항상 결핍되어 있는 삶을 살게 된다.

 이처럼 명상이란 자신의 생각을 걷어내고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방법이다. 이를 통해 집중력, 창의력, 자존감 그리고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쓰며 삶의 방향성과 목표를 명확히 하는 주체성을 얻어 삶을 살아가는데 바탕이 되는 아주 중요한 역량을 키울 수 있는 방법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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