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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상이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가장 큰 힘과 에너지를 주는 것은 바로 '평상심'이다. 어찌보면 희노애락과 생로병사로 가득한 인생에서 평상심을 지니는 것이 명상의 최종적인 목적일 수 있다. 우리는 누구나 삶에서 위기를 겪는다. 하지만 명상을 수련하면 이 위기의 순간을 지혜롭게 넘기게 된다. 왜냐하면 위기의 또 다른 단면을 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흰히 '위기는 기회다.' 라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위기는 정말 기회가 맞다. 삶에서 맞이하는 위기의 상황은 대게 상실감에 기인한다. 무언가를 잃는 것이다. 직장을 잃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건강을 잃고, 재산을 잃고... 하지만 명상수련을 하는 사람들은 알고 있다. '비워지면 채워진다'는 것을. 모든 것이 비워지면 채워지게 마련이다. 삶의 비워진 자라에는 또 다른 삶이 채워지기 마련이다. 어쩌면 기존의 삶보다 더 좋은 것이 채워질 수도 있다. 명상수련을 하는 사람은 이를 알기 때문에 상실과 위기의 순간에 절망하지 않는다. '이 위기 덕분에 더 좋은 것이 올 수 있다!' 는 가능성에 마음이 열려있으므로 위기와 상실의 순간에도 평화롭고 여유로운 마음을 유지할 수 있다.

 평화롭고 여유로운 상태를 유지하기 때문에 주변에서 삶의 새로운 기회들이 찾아오는 것이다. 절망하여 술과 약물과 절망감에 쩔어있는 사람에게 주변의 어느 누가 새로운 기회를 주고 싶을까. 위기가 찾아와도 평소처럼 성실하고 맑은 상태를 유지할 때 주변의 사람들도 새로운 기회를 전해주는 것이다. 명상수련을 하는 사람들은 항상 이 '맑고 고요한 상태'를 유지하여 전일하고 성실하게 생활할 뿐이다.

 반면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삶을 살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사실은 성공하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을 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일 수 있다. 잃어버릴 것이 많기 때문이다. 또한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건강과 정신을 헤칠 상황이 많이 생기며, 많은 것을 가졌다는 사실이 사람을 오만불손하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명상수련을 하는 사람들은 알고 있다. 이 또한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물질의 상태는 항상 변화하는 것이다. 나에게 온 물질적인 것들은 어느 순간 내 손을 떠날 수 있는 것이다. 영원한 물질의 집착은 없다. 명상수련을 하는 사람은 이 변화의 상태를 항상 관찰하기 때문에 많은 것을 소유하고도 집착하지 않는다. 그 하고 많은 물량이 다 내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항상 겸손할 수 있다. 진정 지켜야 할 내면의 본질에 충실하기 때문에 많은 것을 가지고도 집착하지 않고 겸손하다. 집착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내 곁을 오랫동안 떠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많은 재산과 명예를 가지고 있다고해서 그것이 모두 내 것이라 동일시 해버려 오만방자 해지는 사람들에게는 언젠가 그것들이 다 떠날 것이다. 물질계는 항상 서로 저항하고 부딧히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집착과 이기심의 덩어리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주변의 저항을 사게되고 그것은 파멸하게 되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명상수련자는 물질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오로지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곁에 두는 것이다. 고요하고 여여한 내면의 진실만을 지켜나갈 뿐이다. 



 불교사상을 공부함에 있어 가장 큰 오해와 망상에 빠지는 부분이 바로 '공(空)' '무상(無想)' '무아(無我)' 에 대한 것이다. 사실은 '없다' 가 아니라 '아니다' 라고 표기해야 올바른 설명이 되는 부분인데 '없다'라고 표기해버리니 모든 것이 없고 공허하다라는 허무주의에 빠지게 만든다.

 정확한 이해는 '색성향미촉법'과 '오온(법수상행식)'은 진짜 나가 '아니다' 라는 표현이 옳다. 이 설명이 석연치 않게 느껴진다면 두 눈 똑바로 뜨고 대표적인 불경 몇가지를 제대로 읽어보길 바란다. 어느 불경에서도 부처님은 이 세상은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주의를 설파하지 않았다. 다만 오온이 내가 아니고, 색성향미촉법이 내가 아니고, 형상이 내가 아니라고 하였다. 이 모든 것이 내가 아님을 깨달을 때 바로 '그 자리'의 실체를 파악한다면 허망하지 않고 열반을 얻을 수 있다한 것이다.

 부처님은 '실존'과 '열반'을 적극 옹호한 분이다. 다만 이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은 최소화하였다. 그렇지만 존재의 실존을 직관하는 깨어었음, 고통이 소멸된 열반의 상태를 옹호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이 세상은 '아무 것도 없다' 라고 해석했다는 오해를 산 것일까?

 대승불교는 많은 부분에서 긍정적인 작용을 하였지만, 대중을 설득하고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언어적 장치가 필요하였다. 이는 기독교 역시 마찬가지이다. 기독교 역시 글조자도 모르는 대중들에게 진리를 이해시키기 위해 많은 서사적 장치를 추가한 것이다. 하지만 대중들은 이 '장치'들을 직설적으로 믿어버렸다. 심지어 이 장치들에 집착하여 본말전도가 되어버리는 상황까지 치닫는다.

 불교를 공부함에 있어 가장 유의하여야 하는 부분이 바로 이 '아무 것도 없다'는 공사상에 대한 삿된 견해이다. 불교를 공부하며 허망함을 느낀다면 이는 매우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모든 고통이 소멸된 상태, 그 여여한 침묵의 상태에서부터 행복한 삶을, 깨어있는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 진정한 불교의 메세지이다.


전생과 윤회는 우리에게 있어 꽤나 흥미가 가는 이야기거리이다. 우리는 왜 전생이나 윤회에 흥미를 느끼는 것일까? 일단 전생이라는 것은 꽤나 낭만적이다. 전생은 내 안에 나도 모르는 과거와 어떠한 삶의 발자취가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매우 낭만적이며, '나 조차도 모르는 또 다른 나' 를 만나게 해주는 신비로운 창구가 되기도 한다.
 전생이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서 전생이 심리적으로 자신의 내면에 존재한 또 다른 자아를 탐색하기 위한 도구가 되기도한다. 이는 마치 타로카드와 같다. 타로카드처럼 우연에 의해 생성된 어떠한 이미지를 패로 두고 이를 거울삼아 사실은 나의 내면을 탐색하는 것이다. 이는 심리적인 치유의 한 방법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전생체험을 유도하는 최면술사나 심리상담가가 상담자를 최면상태에 빠져들게 하여 그의 무의식에서 나오는 이미지나 언어를 포착한다. 또한 심지어는 상담가가 전생을 리딩한다하며, 상담자를 보고는 전생을 술술 말해주기까지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생이 존재하느냐가 아니다. 그 떠오르는 이미지가 진짜 전생이느냐가 아니다. 그저 어떤 이유로든 포착된 무의식 속의 이미지를 거울삼아 사실은 상담자의 내면을 관찰하는 거울 같은 도구로 삼는 것이다. 어디로가든 종착역에 도착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상담자의 내면에 있는 어떠한 문제점을 끄집어내어 그것을 해소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전생과 윤회는 또한 현재의 부조리를 설명하는 수단이 된다. 많은 종교에서는 어떠한 이상향을 제시한다. 하지만 그 이상향에 비해 현실은 매우 불평등하고 참혹하다. 누구든 삶에서 자신이 처한 고난과 불공정함에 대한 설명을 원한다. 그럴때 사용하는 도구가 바로 '전생의 업보'인 것이다. '현재 나의 모습은 전생으로부터 이어져온 인연법에 의해 갖춰진 것이고, 앞으로의 모습은 현재가 지어간다.'는 강력한 논리는 과학적이냐를 떠나서 굉장히 힘있는 설득력을 갖추기 마련이다. 적어도 현재 나의 모습에 대한 부조리를 해소하지는 못해도 앞으로 내가 살아갈 삶은 현재 나의 모습이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생이나 윤회는 명상과 수행에 입문하는 초보수련자들을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 이에 너무 집착할 필요는 없다. 사실 '참나'의 시각에서 볼때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영원불멸성의 참나의 시각에서 시간성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시간의 흐름이란 유한한 존재가 생멸의 과정에서 느끼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절대자에게 시간성은 필요없다.
 명상의 깊은 상태에서는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수히 이어지는 현재만 있을 뿐이다. 무수히 이어지는 현재에 육신과 같이 별리의 상태가 찾아온다면 시간성이 부여되는 것이다. 하지만 '참나'는 시간성이 부여되지 않느다. 영원한 현재만 있을 뿐이다.
 그렇게 때문에 진정한 수행자라면 전생체험이나 이러한 것들에 집착할 이유가 없다. 다만 현재의 참나에 등불을 밝혀라! 오직 이것만 있을 뿐이다. 현재의 참나에 등불을 밝히는 것이 과거와 미래를 모두 밝히는 것이다. 오로지 현재를 밝힘으로써 과거의 업보도, 미래의 그늘도 걷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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