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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과 윤회는 우리에게 있어 꽤나 흥미가 가는 이야기거리이다. 우리는 왜 전생이나 윤회에 흥미를 느끼는 것일까? 일단 전생이라는 것은 꽤나 낭만적이다. 전생은 내 안에 나도 모르는 과거와 어떠한 삶의 발자취가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매우 낭만적이며, '나 조차도 모르는 또 다른 나' 를 만나게 해주는 신비로운 창구가 되기도 한다.
 전생이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서 전생이 심리적으로 자신의 내면에 존재한 또 다른 자아를 탐색하기 위한 도구가 되기도한다. 이는 마치 타로카드와 같다. 타로카드처럼 우연에 의해 생성된 어떠한 이미지를 패로 두고 이를 거울삼아 사실은 나의 내면을 탐색하는 것이다. 이는 심리적인 치유의 한 방법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전생체험을 유도하는 최면술사나 심리상담가가 상담자를 최면상태에 빠져들게 하여 그의 무의식에서 나오는 이미지나 언어를 포착한다. 또한 심지어는 상담가가 전생을 리딩한다하며, 상담자를 보고는 전생을 술술 말해주기까지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생이 존재하느냐가 아니다. 그 떠오르는 이미지가 진짜 전생이느냐가 아니다. 그저 어떤 이유로든 포착된 무의식 속의 이미지를 거울삼아 사실은 상담자의 내면을 관찰하는 거울 같은 도구로 삼는 것이다. 어디로가든 종착역에 도착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상담자의 내면에 있는 어떠한 문제점을 끄집어내어 그것을 해소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전생과 윤회는 또한 현재의 부조리를 설명하는 수단이 된다. 많은 종교에서는 어떠한 이상향을 제시한다. 하지만 그 이상향에 비해 현실은 매우 불평등하고 참혹하다. 누구든 삶에서 자신이 처한 고난과 불공정함에 대한 설명을 원한다. 그럴때 사용하는 도구가 바로 '전생의 업보'인 것이다. '현재 나의 모습은 전생으로부터 이어져온 인연법에 의해 갖춰진 것이고, 앞으로의 모습은 현재가 지어간다.'는 강력한 논리는 과학적이냐를 떠나서 굉장히 힘있는 설득력을 갖추기 마련이다. 적어도 현재 나의 모습에 대한 부조리를 해소하지는 못해도 앞으로 내가 살아갈 삶은 현재 나의 모습이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생이나 윤회는 명상과 수행에 입문하는 초보수련자들을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 이에 너무 집착할 필요는 없다. 사실 '참나'의 시각에서 볼때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영원불멸성의 참나의 시각에서 시간성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시간의 흐름이란 유한한 존재가 생멸의 과정에서 느끼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절대자에게 시간성은 필요없다.
 명상의 깊은 상태에서는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수히 이어지는 현재만 있을 뿐이다. 무수히 이어지는 현재에 육신과 같이 별리의 상태가 찾아온다면 시간성이 부여되는 것이다. 하지만 '참나'는 시간성이 부여되지 않느다. 영원한 현재만 있을 뿐이다.
 그렇게 때문에 진정한 수행자라면 전생체험이나 이러한 것들에 집착할 이유가 없다. 다만 현재의 참나에 등불을 밝혀라! 오직 이것만 있을 뿐이다. 현재의 참나에 등불을 밝히는 것이 과거와 미래를 모두 밝히는 것이다. 오로지 현재를 밝힘으로써 과거의 업보도, 미래의 그늘도 걷어지는 것이다.

 

 

 

 나는 요즘 가야금을 다루는 것에 푹 빠져있다. 헌데 가야금을 다루는 일은 만만치 않다. 매우 섬세하고 엄격하게 선율을 맞춰하지 않으면 선생님으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지기 일쑤이다. 왜냐하면 조금이라도 박자와 음정이 틀어지면 음악 자체를 망쳐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가야금을 배우며 나의 태극권을 수련했던 지난 날을 반성해보았다. 나는 투로를 행공할 때 이렇게 악기를 다루듯 엄격하였는가? 나는 나의 몸을 다룰 때 이 악기를 다루듯 정성껏 다뤘는가... 절대 그렇지 않았다. 자주 투로의 운행과 무게중심의 이동을 허투루 하였었고, 요결을 지키지 않고 딴 생각에 빠져있을 때도 많았다. 또한 진도를 빨리 나가고 싶은 욕심에 몸이 축나는지도 모르고 마구 파괴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며 다급하게 행공하였던 적도 많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니 한 때 왜 그렇게 태극권을 하면 무릎이 아팠었는지, 태극권을 배우는데도 심기가 불안정한지... 그 원인을 가야금을 다루며 알 수 있었다. 즉 정성과 집중력이 부족하였던 것이다. 악기는 조금만 틀려도 티가 나기 때문에 집중력이 흐트러질래야 흐트러질 수도 없다. 그랬다간 나한테도 들키고 남한테도 들켜버린다. 하지만 태극권은 조금 안일하게 하여도 티가 잘 안난다. 아니, 당장에는 티가 잘 안나지만 결국 몸의 부작용으로 크게 탈이 나버린다. 

 태극권을 수련할 때도, 나의 몸을 관리할 때도 바로 이 악기 다루듯 움직임 하나 하나 정성을 다하는 것, 이것이 매우 중요한 요결이다.

 

 태극권의 요결에는 '기침단전(氣沈丹田)'이라는 말이 있다. (기침을 단전으로 하라는 뜻이 아니다.) 기를 단전으로 내리라는 뜻이다. 또한 '이의도기 이기운신' 이기 때문에 의식이 가는 곳에 기가 간다. 즉, 의식을 단전에 두어 기를 단전으로 내리라는 뜻이다. 

 

 '기침단전'을 하기 위해서는 일단 고관절을 이완하고(송과) 꼬리뼈를 내리고 감아야 한다.(미려중정)  또한 어깨와 팔꿈치를 이완하면(침견추주) 몸의 물리적 중심이 단전에 집중된다. 그 상황에서 의식이 단전을 바라보게 되면 '기침단전' '의수단전'이 이뤄지는 것이다.

 

 태극권은 '움직이는 선' 이라고 한다. 즉, 움직이는 선가의 수련이자 명상인 것이다. 태극권이 이런 우아한 칭호를 받게 된 이유는 위에서 서술한데로 태극권의 요결 자체가 기가 막히게(태극권에서 기막히면 죽는데...쩝) 명상 혹은 선도(仙道)수련의 원리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명상수련 역시 그 핵심은 호흡 혹은 단전에 의식을 집중하는 것에 있다. 태극권은 권의 요결을 위해 자연스럽게 선가의 요결에 맡닿은 것이다.

 

 

 

 

 태극권이 '기침단전'을 강조하는 이유는 첫째 무술적 목적에서 시작하였다. 무술에 있어서도 기침단전은 매우 중요하다. 일단 단전에 의식과 힘의 중심을 두면 엄청난 운동능력의 향상을 가져온다. 부분적으로 쓰여지던 힘들이 단전을 중심으로 통합되기 시작하면서 힘을 흡수하기도 폭발시키기도 좋아진다. 또한 몸의 중심성이 매우 좋아진다. 

 

 그리고 의식을 단전에 두는 이유는 목숨을 건 결투의 순간 의식을 집중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결투를 할 때 사람들은 보통 흥분한다. 살면서 자주 겪지 못할 매우 특수한 상황에서 감정적으로도 격해있고 자칫 하면 큰 상처나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압박감이 작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럴때일 수록 침착하게 행동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 이는 어떤 분야의 승부사들 모두 공감하는 부분일 것이다. '기침단전'은 유독 태극권만이 아니라 모든 승부에 있어 기본적인 요결일 것이다.

 

 이처럼 태극권은 무술로써 연구 끝에 '기침단전'이라는 원리를 발굴해 내었을 것이다. 또한 진가태극권을 창시했던 진왕정이 후대에 전해줄 때 건강양생적인 요소도 고려하여 권법을 창시하였다 하니 중국을 비롯한 동북아시아 문명권 전체에 퍼져있는 선가의 풍습이나 관념이 당연히 영향을 미쳤으리라...

 

 이런저런 이유로 태극권은 기가 막히게 '움직이는 선(禪)' '움직이는 명상' 이 되었다. 명상이나 기공수련을 하는 사람이라면 필히 태극권을 연구해봐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단전을 이야기 하기가 매우 난감한 이유는 분명 수련을 하는 사람에게는 단전자리가 느껴지는데, 일반인들에게는 느껴지지도 않고 또한 해부생리학적 기관(Organ)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수련을 하는 사람들의 주관적 착각에 의해 만들어진 난해하고 몽매한 환상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경험적으로 검증되지 않는 것을 잘 안 믿는 성향이 있다. 그래서 처음 태극권 수련을 접할 때 내적 갈등이 있었다. 태극권의 특유의 몸짓과 그것이 내포한 도가철학의 매력 때문에 태극권을 수련하였지만 '기'니 '단전'이니 '소주천' 따위의 말들을 잘 믿지 않았었다. 왜냐하면 초심자였던 나에게 그런 감각들이 느껴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련이 무르익어감에 따라 몸의 열감이나, 자기장 혹은 물줄기 같은 기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단전의 느낌이 확연해지면서 다시금 내적 갈등이 시작되었었다. 분명 내 주관적 감각으로는 느껴지지만 이것을 경험적, 과학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왜 그런 갈등을 하였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인체란 질량을 가진 에너지 덩어리이다. 또한 인체는 끊임없이 순환하며 창조와 파괴의 재생산이 이뤄진다.  자연히 중력, 전자기장, 혈압, 근육 등 다양한 에너지와 물리적 흐름으로 가득하다. 수련이란 이러한 에너지의 흐름을 섬세하게 자각하고, 이를 컨트롤 해가는 과정이다. 마치 비가 내리면 하천이 생기고, 바람에는  지형의 특성을 반영한 방향이 있으며, 사람이 다니는 길에는 도로가 나듯 인체도 특정한 운동방향에 따라 에너지의 일관된 흐름이 생긴다. 그것을 경락이라고 하는 것이다.

 마치 하천과 하천이 모여 저수지가 되고 바다가 되듯, 도로와 도로가 모여 결절지가 되고 도시가 생기듯, 인체의 에너지도 들고 나는 곳이 집중되는 지역이 생기는데 이를 단전이라 하는 것이다. 대게 인체의 물리적 에너지가 집중되는 곳이 하단전, 인체의 순환적 에너지가 집중되는 곳이 중단전, 인체의 정신적 에너지가 집중되는 곳이 상단전이다.

 하단전이 위치한 곳 주변에는 허벅지, 고관절, 생식기, 창자가 있다. 이들은 근력의 형성, 소화와 배설, 생식 등 인체의 물리적 영역을 담당한다.
 중단전이 위치한 곳 주변에는 심폐와 간위가 집중하여 인체의 순환적 영역을 담당한다.
 상단전이 위치한 곳 주변에는 뇌와 눈이 집중하여 인체의ㅣ 정신적 영역을 담당한다.

 단전은 '에너지 감각'이다. 에너지의 형태와 역할에 따라 그것이 집중되는 곳이 있기 마련이고, 그 부분을 '감각' 하는 것이다. 단전을 인체의 기관이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단전은 '감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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