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ument.onkeypress = getKey;

 

 파탄잘리 요가수트라 2장 수행의 장에서 역시 요가와 참나에 대한 훌륭한 설명을 하고 있다. 

 

고행을 하고, 자신을 성찰하며, 경전을 공부하고, 신에게 헌신하는 것이 행동의 요가이다.

행동의 요가의 수행 실천은 고통을 줄이고 삼매로 이끄는 것이다.

고통의 원인은 다섯 가지가 있는데 영적인 무지, 나라고 하는 에고 의식, 집착하는 마음, 증오심, 애착 등이다.

=> 불교에서 말하는 고통의 원인인 '탐진치'와 거의 비슷한 말이다. 불교는 독자적인 이론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당시 힌교문화 전반의 쟁점인 '열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다만 부처의 위대함은 열반을 이야기함에 있어 우파니샤드에 기반한 복잡한 이론을 단순화하고, 계급을 타파하였으며, 요상한 도술이나 환상에 심취한 수행자들을 비판한데 있다. 부처는 오로지 검증할 수 있는 진실만을 이야기했다.

 

무지는 모든 고통의 원인이다. 그것들이 잠자고 있든지, 힘이 약화되어 잇든지, 멈추어져 있든지, 완전히 활성화되어 있든지 무지라는 밭에 존재한다.

영원하지 않는 것을 영원한 것으로, 비순수한 것을 순수한 것으로, 고통을 즐거움으로, 참나가 아닌 것을 참나로 아는 것은 무지이며, 영적인 지혜가 막힌 것이다.

에고 의식이란 바라보는 대상을 바라보는 자가 그릇되게 동일화하여 일어난다.

=> '에고의식'이란 끊임없이 변화하는 대상이므로 진정한 나의 본성(참나)가 아니다. 하지만 에고의식이 '진정한 나'와 동일시하는데서 고통의 원인이 시작된다.

 

집착은 즐거움이라는 경허모가 동일화함으로써 일어난다.

증오는 괴로운 고토오가 동일하게 생각함으로써 일어난다.

삶의 집착은 수많은 잠재된 경험에 의해 생기며, 그것은 무지한 사람뿐만 아니라 현명한 이에게도 있다.

이러한 고통은 생각이 섬세할 때 약화된다. 

고통의 작용인 생각의 움직임은 명상을 통해 고요함으로 들어간다.

=> 끊임없이 요동치는 생각을 명상을 통해 고요히 함으로써 '진정한 본성(참나)'이 드러날 수 있다.

 

 파탄잘리 요가수트라를 설명하는 첫번째 글에서도 이야기하였지만 요가의 목적은 끊임없이 부질없이 변화하는 나의 '탐진치'와 '에고의식'으로부터 동일시된 '나'를 객관화함으로써, 즉 참나의 객관적 관점을 얻어냄으로써 마음을 통제하고 고통의 소멸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를 위한 수단으로 요가를 하는 것이고, 요가를 통해 명상의 상태에 진입하는 것이다. 명상을 통해 참나를 체험하고 고통의 소멸을 가져옴으로써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요가와 명상은 이 이외의 목적은 없다! 이 이외의 어떠한 삿된 망상이나 환영에 속지 말라.

 참고로 위의 요가수트라의 내용을 참고한 저서는 '박지명, 이서경 주해' <요가수트라>입니다. 제가 블로그에서 소개한 내용은 정말 이 책의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이 외에 많은 내용이 있으므로 꼭 구매해서 요가수트라 전체를 꼼꼼히 읽고 공부해주길 바랍니다. 그 정도의 투자와 노력은 있어야 공부를 성취할 수 있는 법입니다. (저는 이 책의 저자와 아무런 관련도 없습니다.)





 학교의 책들을 정리하다 매우 레어한 책을 발굴했다. 번뜩이는 생각은 '이거 절판된 희귀도서 아냐? 무지 비쌀듯...' 후욱후욱 숨을 몰아쉬며 중고도서에 이름을 검색해보았으나..... 그저 절판되었을뿐 원가보다 싸게 파는 도서같다...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순간을 경험한 뒤 책의 제목 자체가 워낙 나의 관심사라 또 다른 의미의 두근거림으로 책장을 넘겨 보았다. 책의 원제목은 'How to Meditation' 명상은 어떻게하는가? 이다. 저자인 로렌스 레산은 이 책 외에도 명상에 관한 책을 몇 개 더 지은 나름 명상전문가로 보이나 아쉽게도 많은 정보가 있지는 않았다.

 책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무난하고 단정하였다. 첫 장은 '우리는 왜 명상을 하는가' 이다. 이 책은 꽤나 예전에 쓰여졌음에도 명상에 대한 신비주의가 없이 매우 과학적, 심리적 차원에서 명상을 소개하고 있다. 그 어느부분보다 마음에 들었던 부분이다. 명상이란 삶에서 도망치는 환상을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 삶을 위한 활력과 에너지를 얻기 위한 것이라는 명확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마지막장 '명상의 사회적 중요성'에서 저자는 명상에 대해 이렇게 정의내린다.

 "나는 명상의 진정한 목표는 우리가 잃어버렸던 자신의 어떤 부분이 '집으로 돌아온' 느낌을 갖고 더욱 완전한 인간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 책을 시작했다. 우리는 분명히 평온함과 안정, 즐거움, 일상생활에서 큰 효율성, 사랑하는 능력의 증가, 현실에 대한 더 깊은 관점을 얻기 위해서 명상을 한다. 그러한 것들은 우리가 처음에 가지고  시작하는 목표들이고, 그 목표들은 명상수련과 자신을 위해서 훌륭하고 현실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진정한 목표는 인간존재로서의 잠재력을 더욱 완전히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매우 실용주의적 입장에서 명상을 바라보고 있으며, 나 역시 명상을 대하는 태도는 신비주의가 아닌 실용주의이다. 그 전장들의 제목 '명상과 신비주의에 숨어있는 유혹의 함정들' 같은 내용들을 봐도 저자의 관점을 알 수 있다.

 또한 명상의 다양한 방법들을 매우 단정하게 소개하고 있다.응시의 명상, 호흡계산의 명상, 물방울 명상, 만트라 명상 등 다양한 명상들의 내용을 오류없이 간결하게 소개하고 있는 부분이 인상 깊다. 명상에 대한 삿된 오해없이 이해하기 쉬운 책이다.

 잘 알려지지도 않고, 그다지 값비싼 희귀도서도 아니지만 나름 간결하고 단정한 문장 속에 명상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좋은 책이다.

 몇해 전에 에르반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 라는 책을 읽었던 적이 있다. 그 책을 읽었던 이유는... 슈뢰딩거라는 이름이 굉장히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 고양이가 생각나는 거시기였고, 생명에 대해 무진장 호기심이 많던 나는 마치 생명에 대한 심오한 비밀을 이 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뭔가 양자역학적으로다가) 생각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책을 펴자마자 실수였던 것을 깨달았다... 기실 분자물리학적 지식으로 가득했던 이 책은 과학적 교양이 부족했던 나로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책이었다.

 그런데 동일한 제목의 도리언 '세이건' 이라는 코스모스꽃이 웬지 생각나는 자자가 지은 책이 있다고 하였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하였던가... 약간 겁을 먹었지만 그래도 생명에 대한 활활 타오르는 호기심으로 다시금 이 책을 펴보게 되었다.

 확실히 이 책은 에르빈 슈뢰딩거의 책에 비해 상당히 읽기가 편하다. 어려운 분자물리학적 지식이 아닌 생명과학에 대한 기본적인 교양만 있으면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절대 이 책의 내용들이 쉽다는 것은 아니다. 글의 문맥은 분명 이해하였는데 책의 한장 한장을 넘길 때마다 무수한 영감과 생각들이 쏟아져나와 쉽사리 책장이 넘겨지지 않는다. 이 책에서 토마스 만의 소설 <마의 산>에서 묘사한 생명에 대한 해답을 보자.

 
 생명이란 무엇인가? 아무도 그것을 몰랐다. 생명은 생명으로 된 순간부터 자신을 의식하고 있음에는 틀림없지만 자신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지 않았다... 생명은 물질도 아니고 정신도 아니었다. 둘 사이의 중간물로서 폭포에 걸린 무지개처럼, 또는 불꽃처럼 물질을 통해 전달되는 한 현상이다. 생명은 물질은 아니지만, 그러나 욕망과 혐오를 느낄 정도로 민감하고 자신을 감지할 수 있게 된 물질의 음탕한 모습, 존재의 음란한 형식이었다. 또한 그것은 만물의 순결한 냉기 속에서 타오르는 비밀스러운 운동이며, 영야 섭취와 배설의 음탕한 불결이며, 어떻게 생겨나고 만들어지는지도 확실치 않은 불순물과 이산화탄소를 내보내는 호흡이었다.

토마스만 <마의산> 중 -


아! 이 얼마나 놀라운 묘사인가! 나는 글도 음악도 관능미가 넘치는 글을 좋아한다. 이 책은 이런 문학의 내용들을 적절히 인용하면서 생명을 바라봄에 있어 냉랭하고 차가운 과학적 시선에 독자들을 보다 신비로운 환상의 세계로 인도한다.


린 마굴리스는 <코스모스>로 유명한 칼 세이건의 첫째 부인이고, 아들 도리언 세이건은 이들의 자녀이다.



 이 책은 어렵지 않은 내용들로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생물에 대한 경쟁적이고 차가운 시선을 걷어내어 생명현상에는 보다 복잡하고 심오한 작용들이 있음을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이 책의 내용 중 '켄타우로스이자 야누스'를 보자면,

 "미국의 건축가 버크민스터 풀러는 전체가 각 부분의 합보다 더 큰 효력을 발휘하는 실체를 설명하기 위해 '시너지Synergy'(협력한다는 뜻의 그리스어 synergos에서 나온 말) 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과학에서는 생명, 사랑, 행동을 모두 시너지 현상으로 받아들인다. 먼 옛날 어떤 화학 물질들이 물이나 기름 속에서 함께 협력했고, 생명은 바로 그 결과물이었다. 박테리아로붜 원생생물 세포가 창발하고, 그러한 세포들로부터 동물이 창발한 데에 대해서도 역시 시너지가 작용된다.
 생무른 임의적인 유전자 변화에 의해 진화했고, 더욱이 그러한 벼놔는 불리한 경우가 훨씬 많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맹목적이고 우연한 돌연변이가 새로운 진화를 이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다. 지금까지의 진화에서 나타난 커다란 격차는 별개의 진화 계통을 통해 이미 갈고 닦아져 있던, 정교한 구성 요소들 간의 공생적 합병에 의해 달성된 것이다. 새로운 생물 형태가 등장할 때마다 매번 다시 진화가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 돌연변이로 생겨나서 자연 선택에 의해 유지되어 온 기존의 모듈들이 함께 협력하는 것이다. 이들이 연합하거나 합병하여 새로운 생물, 자연 선택에 의해 작용하고  작용받는 전혀 새로운 복합체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찰스 다윈도 잘 인식하고 있었듯이 자연 선택만으로는 어떤 진화적 혁신도 창출할 수 없다. 오히려 자연 선택은 생존이나 생식능력이 부족한 놈들을 추려냄으로써 이전의 개량된 형질과 새로 만들어진 신종을 부단히 유지시킨다. 가능한 한 많은 자손을 남기려는 생물의 잠재려근 살아 남은 놈들이 소중히 돌보게 마련이다. 그러나 최초의 새로운 형질은 어딘가에서부터 발생해야만 한다. 시너지 효과로 보자면 별개의 두 형태가 협력작용을 하여 놀라운 제3의 새로운 형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 <생명이란 무엇인가> 중 -


 이 부분을 읽으며 우리가 기존에 자연선택과 적자생존이라는 편합한 논리로만 생명의 진화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다양한 생물들의 시너지라는 장에서 보다 복잡미묘한 작용을 거쳐 생물의 진화가 창발하는 것이다.

 이처럼 이 책은 생명에 대해 무척 다양한 시선과 사색의 거리를 매우 따뜻한 과학으로, 냉철한 문학으로 제공한다. 아마도 내 최고 애정하는 도서목록에 들어가지 않을까한다.

 "한 사람이 오직 육체적, 정신적 힘만으로 홀로 황무지에서 이런 가나안 땅을 이룩해낼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나는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주어진 힘이란 참으로 놀랍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위대한 혼과 고결한 인격을 지닌 한 사람의 끈질긴 노력과 열정이 없었던들 이러한 결과는 있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때마다, 나는 신에게나 어울릴 이런 일을 훌륭하게 해낸 배운 것 없는 늙은 농부에게 크나큰 존경심을 품게 된다."

 

                                                                                                                   <나무를 심은 사람> 본문 中

 

 

 한 사람의 묵묵한 행동이 황무지를 숲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까? 나무를 심은 사람은 전 세계가 전쟁의 광기에 미쳐있던 1,2차 세계대전 시기에 어느 고원 산악지대의 황무지에 살던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루 하루 묵묵히 나무를 심어 황무지를 숲으로 가꾼 사람. 이 사람의 일생에 걸친 고결하고 활력있는 삶은 진정 사람이 지향해야 할 길에 대한 이야기와 같다.

 

 물질과 폭력, 살육과 이기주의... 세상이 전쟁의 광기에 시달려 사람들은 삶의 방향을 잃어가고 모든 것들이 급속도로 변화할 때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자신의 할바를 일관되게 하였을 때 한 인간이 이뤄낼 수 있는 결과는 신의 능력에 비견할 정도로 위대한 것이다.

 

이야기의 무대인 알프스 남쪽 프로방스 지방

 이 이야기는 또한 공공선의 문제에 화두를 던져준다. 세상에 드러나지도 않고 특별한 대가를 요구하지도 않은채 그는 숲을 일구었다. 결국 이런 고결한 사람들에 의해 세상의 근간이 유지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는 공공선이 공공선이기 위한 조건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그 대가를 외부적인 것에서 찾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보면 대가를 바라지 않는 헌신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이라기 보다는 나무를 심는 행위 자체가 그에게는 스스로에게 이미 보상이 되기 때문에 대가를 바랄 필요가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글에서 그가 나무를 심는 이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의 외모와 행동이 늘상 건강하고 활력넘치며 매우 충만하고 안정감이 있는 위인이라는 묘사만 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생각하게 된다. '그는 왜 나무를 심은 것일까?' 그리고 대답은 그의 외모와 행동에 대한 묘사에서 찾아낸다.

 

책에 삽입되어 있는 판화

 

 그에게는 나무를 심어 세상을 이롭게 하리라는 생각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겠다. 스스로 세상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는 내밀한 자부심이 있었는지도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글쓴이는 이에 대해 그의 생각이나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다만 매사에 건강하고 만족감과 행복이 충만한 그의 모습만을 묘사할 뿐이다.

 

 한시간이면 읽어내는 이 짧은 이야기는 읽는 이로 하여금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끔 한다. 그래서 나도 수번은 읽은 책이다. 또한 동화 같은 애니메이션으로도 나왔는데 개인적으로는 꼭 책을 소장하며 삶의 어느 순간에 반복해서 읽어보길 바란다.

 

 

 "한 인간이 참으로 보기드문 인격을 갖고 있는가를 발견해내기 위해서는 여러 해 동안 그의 행동을 관찰할 수 있는 행운을 가져야만 한다.

 그의 행동이 온갓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있고 그 행동을 이끌어 나가는 생각이 더없이 고결하며,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그런데도 이 세상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것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한 잊을 수 없는 인격과 마주하는 셈이 된다."

 

- 본문 중에서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