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ument.onkeypress = getKey;

 난 가끔 이럴때가 있다. 뒤집혀서 허우적 거리고 있는 풍뎅이나 창틈과 같이 고립된 공간에 갇힌 날벌레들이 보기 안타까워 풀어주려고하면 이 녀석들이 자기를 헤치려는줄 알고 더 발버둥을 치곤 하는 순간 말이다. 그리고 이런 순간에는 가끔 삶의 어느순간에서 고난에 처해 발버퉁치는 내 모습이 오버랩된다.

 벌레에게 자신을 구해주려는 인간의 의도는 감지할 수 없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삶의 고난에서 자신을 구원해주려는 신의 손길을 감지할 수 없다. 그렇다보니 신의 손길을 더 큰 고난이 덥치려는줄 알고 더 물어뜯고 저주한다. 신의 구원이나 행운은 우리에게 마치 거친 손길처럼 고난의 껍질을 쓴 채 찾아올 수도 있는 것이다.

 삶에서 처한 고난이 훗날 생각해보면 큰 행운인 경우가 꽤 많다. 위기는 기회라고, 지나고보면 그 위기의 순간이 인생 최고의 기회였던 것이다. 또한 세옹지마라하지 않았던가. 행운과 불행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찾아오는 것이지 일방적인 행운도 불행도 없다.

 그래서 인간은 고난의 순간에 처해서도 평상심을 유지하고 자신을 지키며, 맑고 또렷한 정신을 지켜야하는 것이다. 그렇게 고난을 인내하다보면 어느덧 그 순간이 기회가 되어 나에게 복을 가져다준다. 한편, 행운의 순간은 마치 달콤한 미끼처럼  인간을 현혹시킨다. 행운이라 믿었던 것이 어느 순간 재앙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승승장구하는 인생의 한 순간에서도 항상 겸손하고 성실한 평상심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오로지 여여한 평상심을 지니는 것이 자신을 지키고 복덕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다.

 

 레게의 전설 밥말리의 명곡 No Woman No Cry'에서 'Everything's gonna ba alright'을 반복하여 되내이는 구절이 있다. 이 노래의 전체가 다 감동이지만 나는 그 구절에서 항상 눈시울을 붉힌다. 마치 밥말리 아저씨가 하느님과 손잡고 나를 위로해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Everything's gonna be alright' 이것은 매우 강력한 주문이자 진리이다. 이 우주의 모든 것은 다 그 존재이유가 있다. 그래서 세상에 존엄하지 않은 존재는 없는 것이다. 내가 그 자신의 존엄성을 굳게 믿을 때 내 삶에서 마주하는 모든 고난들 역시 결국 나를 더 행복한 길로 이끌어주는 여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삶에서 찾아오는 모든 고난, 위기들... 그들에 굴복하고 절망할 필요가 없다. 그 순간에 처해서도 항상 고요하고 여여한 마음을 지닐 때 고난이 손짓해주는 삶의 새로운 방향과 기회를 직시할 수 있는 것이다.

'삶의 위기도 기회도 모두 내 삶을 더 좋게 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이것이 우주의 강력한 법칙이다. 고난과 불행 또한 결국 행운과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라. 그 순간에 절망하지 말라. ''Everything's gonna be alright' 오로지 이 강력한 힘을 믿고 자신을 사랑하라. 내 삶에서 불행과 위기가 찾아올 때 그 순간을 매우 세밀히 관찰해보라. 이것이 나에게 주는 메세지는 무엇인가? '무엇을 돕고자?' 더 좋은 미래를 가져오고자 나에게 이런 고난이 찾아온 것인가! 훗날 나는 분명 더 행복할 것이리라. 

https://youtu.be/2Dq33kK9nDU

 

 

 명상이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가장 큰 힘과 에너지를 주는 것은 바로 '평상심'이다. 어찌보면 희노애락과 생로병사로 가득한 인생에서 평상심을 지니는 것이 명상의 최종적인 목적일 수 있다. 우리는 누구나 삶에서 위기를 겪는다. 하지만 명상을 수련하면 이 위기의 순간을 지혜롭게 넘기게 된다. 왜냐하면 위기의 또 다른 단면을 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흰히 '위기는 기회다.' 라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위기는 정말 기회가 맞다. 삶에서 맞이하는 위기의 상황은 대게 상실감에 기인한다. 무언가를 잃는 것이다. 직장을 잃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건강을 잃고, 재산을 잃고... 하지만 명상수련을 하는 사람들은 알고 있다. '비워지면 채워진다'는 것을. 모든 것이 비워지면 채워지게 마련이다. 삶의 비워진 자라에는 또 다른 삶이 채워지기 마련이다. 어쩌면 기존의 삶보다 더 좋은 것이 채워질 수도 있다. 명상수련을 하는 사람은 이를 알기 때문에 상실과 위기의 순간에 절망하지 않는다. '이 위기 덕분에 더 좋은 것이 올 수 있다!' 는 가능성에 마음이 열려있으므로 위기와 상실의 순간에도 평화롭고 여유로운 마음을 유지할 수 있다.

 평화롭고 여유로운 상태를 유지하기 때문에 주변에서 삶의 새로운 기회들이 찾아오는 것이다. 절망하여 술과 약물과 절망감에 쩔어있는 사람에게 주변의 어느 누가 새로운 기회를 주고 싶을까. 위기가 찾아와도 평소처럼 성실하고 맑은 상태를 유지할 때 주변의 사람들도 새로운 기회를 전해주는 것이다. 명상수련을 하는 사람들은 항상 이 '맑고 고요한 상태'를 유지하여 전일하고 성실하게 생활할 뿐이다.

 반면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삶을 살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사실은 성공하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을 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일 수 있다. 잃어버릴 것이 많기 때문이다. 또한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건강과 정신을 헤칠 상황이 많이 생기며, 많은 것을 가졌다는 사실이 사람을 오만불손하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명상수련을 하는 사람들은 알고 있다. 이 또한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물질의 상태는 항상 변화하는 것이다. 나에게 온 물질적인 것들은 어느 순간 내 손을 떠날 수 있는 것이다. 영원한 물질의 집착은 없다. 명상수련을 하는 사람은 이 변화의 상태를 항상 관찰하기 때문에 많은 것을 소유하고도 집착하지 않는다. 그 하고 많은 물량이 다 내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항상 겸손할 수 있다. 진정 지켜야 할 내면의 본질에 충실하기 때문에 많은 것을 가지고도 집착하지 않고 겸손하다. 집착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내 곁을 오랫동안 떠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많은 재산과 명예를 가지고 있다고해서 그것이 모두 내 것이라 동일시 해버려 오만방자 해지는 사람들에게는 언젠가 그것들이 다 떠날 것이다. 물질계는 항상 서로 저항하고 부딧히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집착과 이기심의 덩어리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주변의 저항을 사게되고 그것은 파멸하게 되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명상수련자는 물질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오로지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곁에 두는 것이다. 고요하고 여여한 내면의 진실만을 지켜나갈 뿐이다. 

 원하는 것을 이루게 하지 못하는 것은 내 내면에 집착하는 감정이다. ‘언젠가는 될거야. 언젠가는 할 수 있을거야. 언젠가는 이곳을 벗어날거야.’ 그놈의 ‘언젠가는’을 통해 우리는 미래의 어느 순간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고 괴롭히고 있다. 하지만 결국 ‘언젠가는’ 이라는 먼 미래를 담보하는 감정과 먼 미래에 대한 집착의 에너지에 우리는 구속한다. 즉 무언가 ‘집착’ 하는 그 감정 자체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결국 원하고자 하는 대상이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집착하는 감정이 목적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될 것이라고 스스로 암시하며, 현재의 집착하는 감정을 되풀이하고 그 것에 빠져있는 것이다.

 

 진정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한다면 지금 당장 해라. ‘Just Do It' 부자가 되고 싶으면 지금 당장 부자가 되라. ’지금 나는 이미 부자다.‘ 라는 생각을 확실하게 가져라. 내가 지금 통장에 잔고가 0원이든, 100만원이든 그 물질 자체는 상대적인 것이다. 누군가에겐 100만원을 가진 것도 부자일 수 있고, 건강한 몸 하나 가진 것도 부자일 수 있다. 내가 부자라 생각하지 않는 것은 단지 나 자신이다.

 

 내가 지금 100만원을 가지고 있는데 나 자신을 부자라 생각한다면 어떻게 행동할까? 100만원자리 핸드백을 사버려 전 제산을 탕진하는 것은 ‘거지 마인드’이다. 100만원을 아끼고 아껴 조금씩 저축하는 것은 ‘서민 마인드’이다. 진정한 부자라면 그 100만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투자하여 200만원으로 불리고, 200만원을 다시 400만원으로 늘리는 최적의 지혜로운 경제활동을 구상하고 적극적으로 실행할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부자마인드’이다. 하지만 내가 가진 100만원의 가치를 모르고 훗날 부자가 될 것이라는 의식에 사로잡혀 그 100만원을 적금통장에 묵혀놓고 하기 싫은 온갖 일을 하며 10만원, 20만원 차곡차곡 모은다면 부자가 되는데 꽤 오랜 시간이 흘러갈 것이다.(그래도 먼 훗날 부자가 될 가능성은 있다.)

 

 중년이여! 자연인이 되고 싶으면 지금 당장 자연인이 되라. 당장 회사를 때리치라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에 텐트와 배낭이라도 넣고 다니며 주말이며 짬이 나는 반나절 동안 자연에 들어가 ‘나는 지금 이미 자연인이다.’ 라고 생각하고 지금 이 순간을 누려라. 자식들 다 분가시켜 놓고, 은퇴하여 연금 받으며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자연이이 될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면 막상 자연인이 된 모든 조건이 갖춰진 순간 주저할 것이며, 매우 허탈할 것이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지금 당장 하라. ‘Just Do It' 이것이 오로지 ’Be yourself'로 가는 지름길이다. 나 자신이 이미 내가 원하는 존재가 되었다 여기고 지금 이 순간부터 원하는 것을 해보자!



 지난번 '송과(고관절의 이완)'의 중요성을 다룬바 있다. 하지만 무릎통증이란 태극권을 수련하는 사람에게 있어 매우 심각하면서도 잘 찾아오는 부작용이기 때문에 이번에는 무릎을 중심으로 한번 더 다뤄보고자한다.

 무릎통증이 생기는 원인은 결론적으로는 쉽게 말해 무릎에 힘을 주기 때문이다. 무릎에 힘을 주는 원인은 다양하다. 전사를 잘못 이해하여 무릎을 돌려버린다든가, 미려를 너무 심하게 감아서 무릎인대에 힘을 준다던가, 몸의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려 무릎에 무게가 실린다던가, 몸의 요결을 갖추지 않고 무작정 자세를 낮춰 무릎에 힘이 들어간다던가, 진도를 빨리 나가고 싶어 태극권을 조바심을 가지고 빨리 한다던가 심지어는 수련전에 몸을 충분히 풀어주지 않아 인대가 뻣뻣하다던가... 여하튼 태극권을 열심히 수련하는 사람들은 대게 위의 경우를 겪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위의 모든 것은 잘못된 것이다. 위의 모든 행위들은 무릎에 힘을 준다. 무릎이 아픈 이유는 관절이 비틀린다던가, 무릎인대에 힘이 들어가는 두가지 이유밖에 없다. 왜냐하면 무릎이라는 기관 자체가 관절, 연골, 인대로만 이루어져있기 때문이다. 관절이 비틀려 연골이 달아버린다든지, 인대에 무리한 힘이 들어가서 무리를 할 경우 무릎이 아픈 것이다. 무릎에는 근육이 없다. 한마디로 무릎은 힘을 쓰는 기관이 아니며 무릎에 힘이 들어가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동작인 것이다.

 그렇다면 무릎에 힘이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해야 하는가? 일단 가장 중요한 것은 고관절을 이완하는 것이다. 고관절이 충분히 이완하면 자세를 낮추거나 높히거나, 전사를 하며 척추를 회전하더라도 그 모든 동작이 고관절의 운동 범위 안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무릎에 힘이 전달되거나 돌아가는 일이 없다. 무릎 이하의 하체는 단단한 나무의 뿌리처럼 박혀있을 뿐이다. 수련전에는 필히 고관절을 충분히 풀어주는 체조와 스트레칭을 해주어야한다.

 또한 상체의 이완된 힘은 무릎이 아닌 허벅지에 실려야한다. 윗허벅지와 단전에 힘을 집중시키기 위해 '미려중정'을 하는 것이다. 꼬리뼈를 늘쿠거나 살짝 감으면 힘의 중심이 윗허벅지와 단전에 실린다. 하지만 이 경우 매우 조심해야 하는 것이 있다. 꼬리뼈를 너무 심각하게 말아버리면 오히려 고관절과 무릎인대가 경직된다. 꼬리뼈를 감을 때는 나의 고관절과 무릎인대가 충분히 부드럽게 이완되어 있는지 동시에 살펴야한다.

 무릎에 힘이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또한 가장 중요하며 기초적인 것이 몸의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리면 안된다는 것이다. 보통 무릎이 발가락끝을 넘어서면 안된다는 말이 이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발바닥에 무게가 실리는 비율을 잘 살펴야하는데 태극권에서는 발바닥 전체에 무게가 고르게 실리고, 발가락은 움켜쥔듯 하여 용천이 텅 빈 느낌이 들어야한다고 이야기한다.  무게중심을 너무 뒤로 빼면 몸이 뒤로 넘어가고 너무 앞으로 실어면 무릎에 힘이 들어간다. 그 묘한 중심을 맞추는 것은 결국 개개인이 수련을 하며 몸을 섬세하게 관찰하여 그 중심을 잡는 것 뿐이다.

 무릎에 힘이 안들어가는 네번째 요령은 전사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 전사경은 힘을 집약시키는 것이다. 절대 몸을 출렁출렁 돌리는 것이 아니다. 송이 몸의 힘을 해방하는 요령이라면, 전사는 몸을 수축하고 통합하는 요령이다. 몸을 수축하고 통합하는데 몸이 출렁거릴 이유가 없다. 특히 무협영화에서 태극권을 묘사할 때 몸이 출렁출렁 회전을 하는데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전사경이 무르익을수록 몸은 오히려 매우 단순해보인다. 실제로 노사님들의 태극권시연모습을 보면 거의 외적으로는 전사경이 느껴지지 않는데 이는 그분들께서 연세가 있어 몸이 둔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효과적으로 전사가 작아진 것이다.  진정한 전사경은 전사경 같아 보이지 않는다.

 무릎통증을 예방하는 다섯번째 요령은 이완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 흔히 무극장을 할 때 몸을 이완하라하면 힘을  빼며 하체를 우그러뜨린다. 몸이 이완하면 침(가라앉는 힘)력이 강해진다. 그래서 몸이 묵직해져 단단히 뿌리박힌 나무 같아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엄연히 말하면 힘을 빼어 몸이 우그러지는 것이 아니라 사방팔방으로 몸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래야 침력과 동시에 몸이 영활해져서 가라앉음과 동시에 날렵한 동작이 가능해진다. 여하튼 몸을 우그러뜨리면 무릎과 관절에 무리만 줄 뿐이다.

 다시 결론을 말하자면 무릎통증이 일아나는 이유는 무릎에 힘을 주기 때문이다. 어떤 동작을 하더라도 무릎에 힘이 들어가면 안되기에 투로를 할 때는 필히 무릎을 살펴 힘이 들어가는지 섬세하게 관찰해야한다.


 태극권 수련을 하는 사람들 중에 매우 큰 망상 중 하나가 바로 발경이다. 무협만화를 보면 기를 모아 한번에 발력하면서 초필살기를 쓰는 캐릭터들이 더러 나온다. 하지만 이 멋진 광경은 만화속에서나 유효한 것이다. 실제 격투에서는 일단 기를 모으다가 흠씬 두드려 맞을 것이고, 운 좋게 상대방이 기를 모을 동안 때리지 않고 기다려주더라도?! 애써 힘을 모아 초필살기를 날렸는데 안맞으면 그만인 것이다.
  즉 발경이란 '힘의 크기'를 키운다는 개념이라기 보다는 '힘을 컨트롤' 하여 영활하고 재빠르게 힘을 활용하는 개념에 가까운 것이다.

 사실상 몸무게가 60kg에 육박하는 포유류인 인간은 누구할것 없이 힘이 세다.특별히 근골의 힘을 키우지 않더라도 60kg이 넘는 성체가 그 무게만 잘 실어 정타를 날려도 그 힘은 상대를 파괴시키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물론 만화처럼 나무나 건물을 파괴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중요한 문제는 세가지이다.

첫째, 무게를 온전히 실어 칠 수 있는가.
둘째, 무게를 온전히 실었다해도 상대에게 유효타를 날릴 수 있는가.
셋째, 내 몸의 타격부위가 그 힘을 버틸 것인가.


 오히려 힘의 크기를 키우는 것보다 이 세가지가 더 어려운 일이다. 첫번째의 경우 예를 들어 근육이 정말 많은 헬스트레이너가 있다고치자. 하지만 그 헬스트레이너에게 샌드백을 쳐보라하면 그 사람의 비주얼에 비해 의외로 힘이 잘 안 날 것이다. 그 이유인즉, 몸이 충분히 이완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근육을 키우는 일은 이완도 중요하지만 수축에 무게를 실어 훈련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수축에만 신경 쓸 경우 힘을 내보내기 힘들어진다. 내가 가진 힘을 내보내는 일은 굉장히 섬세하고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데, 일단 힘을 내는 순간에는 온 뭄이 수축한다. 그리고 거의 그와 동시에 몸을 최대한 이완해야 한다. 또한 타격이 되는 순간에는 몸이 수축이라긴 애매하지만 경질화 혹은 완충되며 내 몸을 보호해야한다.
 흔히 기술을 다루는 장인들이 '다 요령이여' '힘빼고 쳐야해' 라 말하는 것이 바로 위의 섬세한 과정인 것이다. 힘빼고 치라고 해서 진짜 힘빼고 치면 아무 힘이 안난다. 그렇다고 힘을 꽉 주면 그 또한 힘이 안난다. 즉, 힘을 줌과 동시에 힘이 빠지고 타격의 순간에는 타격하는 물체에 힘이 침투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발경이다. 발경은 근육의 이완과 수축, 맺고 끊음을 매우 섬세하게 컨트롤 하는 것이다.

 두번째의 경우 아까 처음에서 설명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투로를 통해 발경을 완성시켰다치자. 투로만 보면 정말 절세고수가 따로 없다. 하지만 요즘 흔히 보듯 '격투기 선수VS중국무술 고수'의 경기에서 중국무술 고수가 맥없이 패배하는 영상이 바로 중국무술 고수의 경우 이 두번째가 훈련되지 않아서 그렇다. 웨이트 트레이닝과 샌드백을 활용하든 전통적인 투로를 활용하든 근골의 힘을 키우게 되면 힘은 커지게 되어있다. 하지만 이렇게 키운 힘을 비정형성을 가진 날렵하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방어하며 심지어는 매몰차게 공격을 해오는 상대방에 유효타를 날리는 것은 굉장히 많은 훈련과 전략이 필요하다. 즉 힘을 키우는 것보다 몸을 영활하게 가지면서 치고 빠지며 적절한 '타이밍'에 유효타를 날리는 훈련이 매우 중요하며, 이것이 이뤄지기 위해서 역시 몸의 이완이 중요한 것이다. 몸이 충분히 이완되어 있어야 다변적 상황에 대처하는 영활하고 날렵한 움직임이 가능하다.

 세번째의 경우 앞의 두가지를 성공시켰다 하더라도 상대를 때렸는데 내 주먹이나 발꿈치가 부서져 버리면 아무 의미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격투를 목적으로 수련을 한다면 어느정도 내 몸의 타격부위를 경질화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물론 전문적인 격투기 선수의 경우 근골의 단단함, 힘의 크기, 섬세한 컨트롤 모두 다 치열하게 키워야한다. 왜냐하면 격투기로 치열한 경쟁을 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해야 상대를 이길까 말까이다.
 하지만 내 몸의 건신을 돕고 호신하기 위한 수준의 무술수련이라면 힘의 크기를 키우는 것에 너무 치중하기 보다는 힘을 섬세하게 컨트롤 하는 것을 매우 중요시해야한다. 발경은 힘의 크기를 키우기 위한 것이라는 만화적인 상상력에서는 벗어나길 바란다.

 

 파탄잘리 요가수트라에서 매우 재미있는 장은 바로 초능력의 장이다. 실제 요가를 수행한 사람들이 초능력을 얻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렇게 진지하게 다양한 초능력에 대해 서술해 놓으니 안 믿기도 무안해진다. 진짜 초능력이 존재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여하튼 초능력의 장 초반에 명상의 정의에 대해 너무 잘 설명하고 있다.

 

집중은 마음을 하나의 대상으로 모아지게 하는 것이다.

마음의 집중이 한 대상에 연속적으로 모아져서 명상이다.

명상이 삼매로 이어지면 명상의 대상이 사라지고, 자신의 본성이 드러난다.

 

 '명상'과 '집중'과 '삼매'는 엄연히 구분하여야한다. 즉, '집중'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면 '명상'이고, '명상'이 지속되면 일체의 탐진치와 에고의식이 소멸되며 내면의 진정한 본성(참나)의 드러남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이것을 '삼매'라고 한다. 대중적인 필요에 의해 명상을 힐링이나 집중력 강화의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명상은 삼매상태에 들어 참나체험을 해야 그 본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참나의 드러남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것은 이론이 아닌 체험이기 때문에 글로써 설명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굳이 글로 표현하지만 '지극한 고요의 상태, 침묵의 상태' 정로도 묘사할 수 있다. 하지만 고요하다는 인식조차 없이 그저 그 영속적인 침묵의 상태에 들어서있다. 

 또한 참나체험에서 오해하면 안되는 것이 참나는 체험의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늘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실 참나는 늘 존재하기에 항상 체험할 수 있다. 하지만 에고의식이 활성화된 평소에는 잘 자각하지 못하므로 요가와 명상수련을 통해 의도적으로 이를 체험하는 것이다. 수련을 통해 습관적으로 참나를 마주보는 연습(견성)을 하였다면 일상의 바쁨 속에서도 수시로 참나의 시각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절대 '견성성불' 한 것이 위대한 것이 아니다. 기실 견성이라함은 의외로 쉽게 체험할 수 있다. 다만 견성한 뒤에 이를 동력으로 어떻게 삶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갈까? 그 삶을 살아낸 이가 진정 위대한 사람, 행복한 사람 붓다인 것이다.

 

 참고로 위의 요가수트라의 내용을 참고한 저서는 '박지명, 이서경 주해' <요가수트라>입니다. 제가 블로그에서 소개한 내용은 정말 이 책의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이 외에 많은 내용이 있으므로 꼭 구매해서 요가수트라 전체를 꼼꼼히 읽고 공부해주길 바랍니다. 그 정도의 투자와 노력은 있어야 공부를 성취할 수 있는 법입니다. (저는 이 책의 저자와 아무런 관련도 없습니다.)



 불교사상을 공부함에 있어 가장 큰 오해와 망상에 빠지는 부분이 바로 '공(空)' '무상(無想)' '무아(無我)' 에 대한 것이다. 사실은 '없다' 가 아니라 '아니다' 라고 표기해야 올바른 설명이 되는 부분인데 '없다'라고 표기해버리니 모든 것이 없고 공허하다라는 허무주의에 빠지게 만든다.

 정확한 이해는 '색성향미촉법'과 '오온(법수상행식)'은 진짜 나가 '아니다' 라는 표현이 옳다. 이 설명이 석연치 않게 느껴진다면 두 눈 똑바로 뜨고 대표적인 불경 몇가지를 제대로 읽어보길 바란다. 어느 불경에서도 부처님은 이 세상은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주의를 설파하지 않았다. 다만 오온이 내가 아니고, 색성향미촉법이 내가 아니고, 형상이 내가 아니라고 하였다. 이 모든 것이 내가 아님을 깨달을 때 바로 '그 자리'의 실체를 파악한다면 허망하지 않고 열반을 얻을 수 있다한 것이다.

 부처님은 '실존'과 '열반'을 적극 옹호한 분이다. 다만 이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은 최소화하였다. 그렇지만 존재의 실존을 직관하는 깨어었음, 고통이 소멸된 열반의 상태를 옹호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이 세상은 '아무 것도 없다' 라고 해석했다는 오해를 산 것일까?

 대승불교는 많은 부분에서 긍정적인 작용을 하였지만, 대중을 설득하고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언어적 장치가 필요하였다. 이는 기독교 역시 마찬가지이다. 기독교 역시 글조자도 모르는 대중들에게 진리를 이해시키기 위해 많은 서사적 장치를 추가한 것이다. 하지만 대중들은 이 '장치'들을 직설적으로 믿어버렸다. 심지어 이 장치들에 집착하여 본말전도가 되어버리는 상황까지 치닫는다.

 불교를 공부함에 있어 가장 유의하여야 하는 부분이 바로 이 '아무 것도 없다'는 공사상에 대한 삿된 견해이다. 불교를 공부하며 허망함을 느낀다면 이는 매우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모든 고통이 소멸된 상태, 그 여여한 침묵의 상태에서부터 행복한 삶을, 깨어있는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 진정한 불교의 메세지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