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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탄잘리 요가수트라에서 매우 재미있는 장은 바로 초능력의 장이다. 실제 요가를 수행한 사람들이 초능력을 얻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렇게 진지하게 다양한 초능력에 대해 서술해 놓으니 안 믿기도 무안해진다. 진짜 초능력이 존재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여하튼 초능력의 장 초반에 명상의 정의에 대해 너무 잘 설명하고 있다.

 

집중은 마음을 하나의 대상으로 모아지게 하는 것이다.

마음의 집중이 한 대상에 연속적으로 모아져서 명상이다.

명상이 삼매로 이어지면 명상의 대상이 사라지고, 자신의 본성이 드러난다.

 

 '명상'과 '집중'과 '삼매'는 엄연히 구분하여야한다. 즉, '집중'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면 '명상'이고, '명상'이 지속되면 일체의 탐진치와 에고의식이 소멸되며 내면의 진정한 본성(참나)의 드러남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이것을 '삼매'라고 한다. 대중적인 필요에 의해 명상을 힐링이나 집중력 강화의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명상은 삼매상태에 들어 참나체험을 해야 그 본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참나의 드러남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것은 이론이 아닌 체험이기 때문에 글로써 설명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굳이 글로 표현하지만 '지극한 고요의 상태, 침묵의 상태' 정로도 묘사할 수 있다. 하지만 고요하다는 인식조차 없이 그저 그 영속적인 침묵의 상태에 들어서있다. 

 또한 참나체험에서 오해하면 안되는 것이 참나는 체험의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늘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실 참나는 늘 존재하기에 항상 체험할 수 있다. 하지만 에고의식이 활성화된 평소에는 잘 자각하지 못하므로 요가와 명상수련을 통해 의도적으로 이를 체험하는 것이다. 수련을 통해 습관적으로 참나를 마주보는 연습(견성)을 하였다면 일상의 바쁨 속에서도 수시로 참나의 시각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절대 '견성성불' 한 것이 위대한 것이 아니다. 기실 견성이라함은 의외로 쉽게 체험할 수 있다. 다만 견성한 뒤에 이를 동력으로 어떻게 삶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갈까? 그 삶을 살아낸 이가 진정 위대한 사람, 행복한 사람 붓다인 것이다.

 

 참고로 위의 요가수트라의 내용을 참고한 저서는 '박지명, 이서경 주해' <요가수트라>입니다. 제가 블로그에서 소개한 내용은 정말 이 책의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이 외에 많은 내용이 있으므로 꼭 구매해서 요가수트라 전체를 꼼꼼히 읽고 공부해주길 바랍니다. 그 정도의 투자와 노력은 있어야 공부를 성취할 수 있는 법입니다. (저는 이 책의 저자와 아무런 관련도 없습니다.)

 

 파탄잘리 요가수트라 2장 수행의 장에서 역시 요가와 참나에 대한 훌륭한 설명을 하고 있다. 

 

고행을 하고, 자신을 성찰하며, 경전을 공부하고, 신에게 헌신하는 것이 행동의 요가이다.

행동의 요가의 수행 실천은 고통을 줄이고 삼매로 이끄는 것이다.

고통의 원인은 다섯 가지가 있는데 영적인 무지, 나라고 하는 에고 의식, 집착하는 마음, 증오심, 애착 등이다.

=> 불교에서 말하는 고통의 원인인 '탐진치'와 거의 비슷한 말이다. 불교는 독자적인 이론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당시 힌교문화 전반의 쟁점인 '열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다만 부처의 위대함은 열반을 이야기함에 있어 우파니샤드에 기반한 복잡한 이론을 단순화하고, 계급을 타파하였으며, 요상한 도술이나 환상에 심취한 수행자들을 비판한데 있다. 부처는 오로지 검증할 수 있는 진실만을 이야기했다.

 

무지는 모든 고통의 원인이다. 그것들이 잠자고 있든지, 힘이 약화되어 잇든지, 멈추어져 있든지, 완전히 활성화되어 있든지 무지라는 밭에 존재한다.

영원하지 않는 것을 영원한 것으로, 비순수한 것을 순수한 것으로, 고통을 즐거움으로, 참나가 아닌 것을 참나로 아는 것은 무지이며, 영적인 지혜가 막힌 것이다.

에고 의식이란 바라보는 대상을 바라보는 자가 그릇되게 동일화하여 일어난다.

=> '에고의식'이란 끊임없이 변화하는 대상이므로 진정한 나의 본성(참나)가 아니다. 하지만 에고의식이 '진정한 나'와 동일시하는데서 고통의 원인이 시작된다.

 

집착은 즐거움이라는 경허모가 동일화함으로써 일어난다.

증오는 괴로운 고토오가 동일하게 생각함으로써 일어난다.

삶의 집착은 수많은 잠재된 경험에 의해 생기며, 그것은 무지한 사람뿐만 아니라 현명한 이에게도 있다.

이러한 고통은 생각이 섬세할 때 약화된다. 

고통의 작용인 생각의 움직임은 명상을 통해 고요함으로 들어간다.

=> 끊임없이 요동치는 생각을 명상을 통해 고요히 함으로써 '진정한 본성(참나)'이 드러날 수 있다.

 

 파탄잘리 요가수트라를 설명하는 첫번째 글에서도 이야기하였지만 요가의 목적은 끊임없이 부질없이 변화하는 나의 '탐진치'와 '에고의식'으로부터 동일시된 '나'를 객관화함으로써, 즉 참나의 객관적 관점을 얻어냄으로써 마음을 통제하고 고통의 소멸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를 위한 수단으로 요가를 하는 것이고, 요가를 통해 명상의 상태에 진입하는 것이다. 명상을 통해 참나를 체험하고 고통의 소멸을 가져옴으로써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요가와 명상은 이 이외의 목적은 없다! 이 이외의 어떠한 삿된 망상이나 환영에 속지 말라.

 참고로 위의 요가수트라의 내용을 참고한 저서는 '박지명, 이서경 주해' <요가수트라>입니다. 제가 블로그에서 소개한 내용은 정말 이 책의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이 외에 많은 내용이 있으므로 꼭 구매해서 요가수트라 전체를 꼼꼼히 읽고 공부해주길 바랍니다. 그 정도의 투자와 노력은 있어야 공부를 성취할 수 있는 법입니다. (저는 이 책의 저자와 아무런 관련도 없습니다.)

 

 산딸나무는 국화군에 층층나무과에 속한다. 6월총에 길을 다니다보니 산딸나무꽃이 피었다. 산딸나무꽃은 매우 재미있게 생겼다. 마치 꼬마친구가 하얀종이로 꽃을 만들어 나무에 달아놓은 것 같다. 네개의 넓직한 꽃잎 가운데 몽우리가 잇는 것이 특징이다.

 

 

 층층나무는 멀찍이서 봐도 쉽게 구분이 가는 나무들이다. 신기한 것이 막대기처럼 하나의 줄기가 곧게 자라다가 특정지점에서 옆으로 가지가 촥~ 둥글게 퍼진다. 그리고 또 곧게 줄기가 자라도 특정지점에서 가지가 촥~~ 퍼지고... 층층나무를 보고 있자면 식물이 가진 생김새의 패턴과 규칙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산딸나무는 9월경에 열리는 열매가 딸기 같이 생겨서 이름이 산딸나무이다. 9월경 꼭 이 나무를 다시 찾아가 열매를 먹어봐야겠다. 딸기처럼 달달하고 맛있는 열매라니 기대된다.

 산딸나무에 대한 흥미로운 설화는 예수님께서 못박히실 때 썻던 나무가 바로 이 산딸나무라고 한다.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인지 산딸나무 꽃의 모양이 십자가이다. 생김새에서부터 이런 숭고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나무라 생각하고 보니 무언가 숙연해지는 면이 있다.

 

 

 파탄잘리는 기원전 2,3세기에서 기원후 1~5세기까지 어느 시대에 살았는지 불분명한 인물이다. 마치 노자나 달마와 같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요가수트라>는 요가의 원리를 아주 일목요연하게 집대성하고 있다. 파탄잘리의 설명에 의하면 '요가 yoga'란 '마음의 상태를 통제하는 것'이다. 또한 여러 어원 중 하나는 '힘쓰다'의 뜻도 담겨있다. 유목민 계통의 아리아인이 잠시의 정착을 위해 '이동하는 기간'은 매우 고된 것이었고 이 기간에 힘쓰는 것을 요가라고 했다는 어원이 있는 것이다. 또한 '수트라'는 한자로 '경전'이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요가수트라>는 요가에 대한 경전이다.

 

 그의 저서 <요가수트라>에서 요가에 대해 매우 잘 설명하고 있다.

지금부터 요가의 가르침이 시작된다.

요가는 마음의 상태를 통제하는 것이다.

그래서 보는 자는 그의 진정한 본성 안에 살고 있다.

=>내면의 영성(혹은 참나)을 통해 삿된 마음의 상태를 통제하는 것이다. 

 

요가의 상태가 아닌 다른 상태는 상념과 동일화된다.

상념의 움직임에는 다섯 가지 종류가 있으며, 고통을 일구어내는 것과 고통을 일구어내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올바른 지식, 잘못된 지식, 환영, 잠, 기억에 기인한다.

올바른 지식은 직접적으로 인식되는 것이며, 추론되며 전승된 것이다.

실재가 아닌 지식은 없는 것이며, 자신의 본성이 아니다.

언어의 착각은 말이 실재와 일치하지 않을 때 일어난다.

잠은 마음의 작용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기억은 인식한 대상을 잊지 않고 다시 경험하는 것이다.

다섯 가지 마음의 상태는 무집착의 반복적인 실천을 통해 통제된다.

=> 진정한 본성에 의해 마음이 온전히 통제된 상태가 아닌 다섯 가지 마음의 상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마음의 상태를 무집착의 반복적인 실천을 통해 통제하는 것이 요가이다.

 

수행의 실천은 계속되는 집중을 통해 확고해진다. 

수행의 실천은 헌신의 마음으로 끊이지 않고 오랜 기간 했을 때 확고하게 자리잡는다.

무집착은 최상의 의식, 즉 보고 듣는 데서 생기는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 여기까지가 요가수트라의 초반부이며, 요가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장부터는 마음이 통제된 다양한 상태(유상삼매, 무상삼매)에 대한 세밀한 설명과 명상, 초능력, 해탈 등 다양한 상태에 대한 이야기들이 지속된다.

 

 현대인들은 요가를 많이 한다. 물론 미용, 운동 등의 목적이 주요하겠지만 요가의 본래적인 목적을 올바르게 알 필요가 있다. 마음의 온전한 통제를 통해 평화와 고요한 열반에 도달하는 것이다. 요가의 방법론이 꼭 몸을 스트레칭하고 어려운 동작들을 완성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마음의 상태를 통제하기 위한 많은 방법론 중 하나이다. 요가에는 신에 대한 헌신과 기도, 학문을 탐구하는 것, 사회생활에서 봉사하는 것 등 다양한 종류의 요가가 있다. 결국 요지는 이 다양한 방법론들을 통해 '마음의 상태를 통제하는 것' 이다.

 또한 요가에 이상하게 심취한 사람들 중에는 쿤달리니가 어쩌구, 차크라와 제 3의 눈이 각성하면 몸에 어떤 반응과 감각이 오고... 등등 이런 것들에 집착하고, 마치 이런 감각을 얻어내면 무언가 비범한 깨달음이나 성취를 얻어낸 것처럼 허세를 부리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따. 이 역시 매우 잘못된 수행자의 태도이다. 그런 감각에 취한 것이 마약에 취한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런 감각을 얻음으로써 구체적인 초능력이 생겼나? 차라리 진짜 초능력이 생겼다면 엄청난 성취를 한 것이다. 하지만 초능력이라도 생긴것처럼 말하고 다니는 사람치고 실제로 보여주며 증명하는 사람이 한명도 없다. 전생을 볼 줄 안다느니, 미래를 볼 줄 안다느니, 유체이탈을 할 줄 안다느니.... 어차피 남에게 증명되지도 않는 것을 한다고 말한다. 한심할 뿐이다.

 요가의 궁극적인 목적은 '마음의 평화, 즉 고통이 소멸된 상태인 열반에 도달하는 것' 이다. 하여 진정으로 실존적이고 건강하며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 외에 온갓 삿된 견해를 말하고 다니는 사람들을 절대 믿지 않길 바린다. 파탄잘리 요가수트라 어디를 눈씻고 찾아봐도 그런 삿된 견해에 집착하라는 말은 나와있지 않다. 오히려 그런 잘못된 인식과 감각작용으로부터 집착을 내려놓는 훈련을 하며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만나라고 말할 뿐이다. 이것이 파탄잘리 요가수트라의 메세지이다.

 

 참고로 위의 요가수트라의 내용을 참고한 저서는 '박지명, 이서경 주해' <요가수트라>입니다. 제가 블로그에서 소개한 내용은 정말 이 책의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이 외에 많은 내용이 있으므로 꼭 구매해서 요가수트라 전체를 꼼꼼히 읽고 공부해주길 바랍니다. 그 정도의 투자와 노력은 있어야 공부를 성취할 수 있는 법입니다. (저는 이 책의 저자와 아무런 관련도 없습니다.)



손불이는 금나라의 도사이다. 중국에서의 도가사상의 발전에 있어 신기한 점은 도가 혹은 도술은 대게 '위진 남북조' '송' '금' '청' 등 전통적인 한족이 아닌 북방계 유목민족이 중흥하던 시대에 발달하게 된다. 교과서적인 설명으로는 그 당시가 중국이 어지러웠던 시대인만큼 개개인의 내적 평화와 안정을 추구하였다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극히 한족 중심적인 역사서술일뿐, 북방계 유목민족의 입장에서는 어느때보다 풍요로운 전성기였을 것이다. '중국'은 사실 특정한 정체성이 없다. 북방계 유목민, 중부의 한족, 남부의 여러 쌀문화권 민족들이 서로 역동적으로 의사소통 하였던 역사가 바로 '중국'이다. 그렇게 다양한 민족들의 역동적인 의사소통이 있었기 때문에 다양하고 풍부한 문화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민족주의적 사관을 가진 사람들은 중국의 도가사상은 한민족 혹은 북방계 유목민족들의 선도사상과 관련이 많을 것으로 추측한다. 손불이가 금나라(여진)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이정도로 각설하고...(여튼 중국사에서 손불이는 한족처럼 다뤄진다.) 손불이 자신이 여성이며, <여단법> 역시 여성을 위한 단법 서적이다. 내단법이란 무릇 인체에 대한 섬세한 공부가 있어야 하는데, 여성은 남성과 엄연히 생리적 차원에서 다르다. 그런데 여성을 위한 내단법을 다룬 서적이 없다는데 저자는 이 책의 서술동기를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여단법>의 우수한 점은 몇 가지 점(여성의 월경, 유방 등)에 대한 남성과 상이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남성들이 내단법을 이해하는데도 많은 도움이 되도록 잘 서술하였다는 것이다. 흔히 중국의 대표적인 도술서적으로 <주역참동계>를 꼽지만 주여참동계는 너무 많은 비유와 수사로 그 핵심을 직시하기 너무 어렵다. 하지만 <여단법>은 비유와 설명도 매우 간결하게 잘 하였고, 비교적 이해하기 쉬운 설명을 하고 있다.

 특히 첫장의 '심인경'이 매우 인상깊으며 다음과 같다.


 귀중한 약 세 가지는 신(神)과 기(氣)와 정(精)이다. 황홀하고 그윽한 가운데 무(無)에서 보존하고 유(有)를 지키면 순식간에 이루어지고 바람을 돌이켜 혼합하면 백일공부가 신령스러워져서 조용히하느님을 조회하고 일기(一紀) 만에 날아오르리라. 지혜로운 사람은 쉽게 깨닫고 어두운 사람은 행하기가 어려우리라.

하늘의 광휘를 밟고 호흡으로 청정함을 기르며
현빈(玄牝)*으로 출입시켜 있는 듯 없는 듯
실처럼 끊어지지 않게 하면
꼭지는 굳어지고 뿌리는 깊어지리라.

사람에게는 각기 정이 있으니
정을 그 신에 합하고
신을 그 기에 합하고
기는 그 참됨에 합해야 하는데
그 참된 것을 얻지 못하고 모두 억지로 이름한 것이라.**

신은 바위에도 들어갈 수 있고
신은 형체를 날게 할 수도 있으며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고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 것인데
신은 형체에 의지하여 살고
정은 기에 의지하여 가득하게 된다.***

시들지도 않고 쇠약해지지도 않게 하면
소나무나 잣나무와 같이 푸르리니
세 가지는 하나의 이치이고 그 묘한 것은 들을 수가 없는데
그것을 모으면 있고 그것을 흩으면 없어지게 된다.****

일곱 개의 규(竅)*****가 서로 통하면
규마다 밝게 빛나고 성스러운 해와 성스러운 달이
금정(金庭)을 환히 비치리니
나를 얻으면 영생을 얻게 되어 자연히 몸이 가벼워지리라.

정기가 넘쳐흐르면
뼈에 흩어져서 찬 구슬이 되며
단(丹)을 얻으면 신령스러워지고
얻지 못하면 위태로워지는데
단은 몸 가운데 있어서 희지도 푸르지도 않는 것이라.

-만 번을 읽으면 신묘한 이치가 자연히 밝혀지리라.-



*회음부, 호흡이 회음부로 드나드는 느낌을 갖는다.
**보통 '연정화기-연기화신-연신환원'을 이야기 하지만 기를 그 참됨(원)에 합하는 것으로 설명하기도한다. '참됨' 이란 지극히 고요한 우주만물의 영원불멸성이다.
*** 신이 지닌 무한성을 잘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신의 절대적 우월성이 아닌 '정,기,신'의 상호보완적인 조화로운 관계 속에서 서로의 존재성을 유지할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특히 다른 문화권의 수행법과 차별화된 '도가적 시각' 이기도하다.
**** 단전의 존재에 대한 설명이다. 단전은 잘 배양하는 이에게는 확실한 존재이나, 그것을 흩어지게 한 이에게는 없는 것과 같다.
***** 눈, 코, 입 일곱개의 구멍



우리나라의 내단법도, 중국의 내단법도 결국 정도(正道)를 걷는 올바른 수련이라면 수련의 상승경지에서 얻어지는 '지극히 고요한 상태'를 가장 귀하게 여긴다. 이는 현대의 명상수련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수련을 하며 이런저런 요상한 기의 감각과 환상적인 환영들, 전생이나 미래를 점치는 행위, 귀신과 만나 이야기하는 것들, 혹은 모든 것은 공허하다는 삿된 생각들... 이러한 것들에 빠지지 않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다.
 그런 것들이 실제로 존재하느냐, 아니냐를 논쟁할 필요가 없다. 단지 명상을 통한 수행은 그 '지극히 고요함' '깨어있음'을 얻는 것이 가장 귀한 것이다. 손불이의 <여단법> 역시 이를 강조하고 있다.



 6월초 즈음에 보랏빛 꽃을 피우는 꽃 중에는 바로 이 '엉겅퀴'가 있다. 엉겅퀴는 꽃을 피우기 전에도 상당히 눈에 띄는 식물 중 하나인데 바로 가시투성이의 잎과 줄기 때문이다. 굉장히 심술궂은 생김새를 하고 있다.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인 엉겅퀴는 '고려 엉겅퀴(곤드레)' 와는 다르다. 우리가 흔히 곤드레만드레~ 데쳐서 곤드레밥으로 먹는  고려엉겅퀴는 가시가 없고 잎이 넓적하다. 이 엉겅퀴가 고려엉겅퀴인줄 알고 함부로 데쳐먹다가는 큰 코 다치는 수가 있다. 어린 순은 데쳐먹을 수 있다지만 가시가 드세지면 당연히 건조하여 차로 우려마시거나, 분말이나 효소로 복용하는 것이 현명하리라...



 생존능력이 뛰어나 줄기를 잘라도 뿌리만 잘 살아있으면 다시금 줄기를 친다. 여러해살이풀로 뿌리가 땅 속에서 겨울을 나 이듬해 다시 피어난다. 지혈작용이 뛰어나고 간에 좋은 실리마린이 풍부하여 간염, 간질환에 좋아 건조하여 차, 분말, 효소로 복용할 수 있다.


이렇게 들판에 사악한 모습?으로 듬성듬성 무리지어 자라는 엉겅퀴는 정말 눈에 띈다. 간혹 아래 사진처럼 하나의 개체가 엄청난 크기로 헐크처럼 자라나는 경우가 있는데 정말 악마의 가시넝쿨이나 성 같은 생김새이다.


 엉겅퀴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을 잘 선택한 식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시투성이의 심술궂은 못난이 같지만 볼수록 매력있고 귀염성 있는 식물이기도하다. 강인한 생명력으로 매년 그 자리에서 이듬해에도 반갑게 만날 수 있는 볼수록 매력인 식물이다. 또한 그 꽃은 얼마나 아름다운 보랏빛인가! 아무리 못난이라도 쑥쓰럽게 자신이 가진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만 같은 작은 보랏빛 꽃도 볼수록 매력적이다.



 불교사상을 공부함에 있어 가장 큰 오해와 망상에 빠지는 부분이 바로 '공(空)' '무상(無想)' '무아(無我)' 에 대한 것이다. 사실은 '없다' 가 아니라 '아니다' 라고 표기해야 올바른 설명이 되는 부분인데 '없다'라고 표기해버리니 모든 것이 없고 공허하다라는 허무주의에 빠지게 만든다.

 정확한 이해는 '색성향미촉법'과 '오온(법수상행식)'은 진짜 나가 '아니다' 라는 표현이 옳다. 이 설명이 석연치 않게 느껴진다면 두 눈 똑바로 뜨고 대표적인 불경 몇가지를 제대로 읽어보길 바란다. 어느 불경에서도 부처님은 이 세상은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주의를 설파하지 않았다. 다만 오온이 내가 아니고, 색성향미촉법이 내가 아니고, 형상이 내가 아니라고 하였다. 이 모든 것이 내가 아님을 깨달을 때 바로 '그 자리'의 실체를 파악한다면 허망하지 않고 열반을 얻을 수 있다한 것이다.

 부처님은 '실존'과 '열반'을 적극 옹호한 분이다. 다만 이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은 최소화하였다. 그렇지만 존재의 실존을 직관하는 깨어었음, 고통이 소멸된 열반의 상태를 옹호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이 세상은 '아무 것도 없다' 라고 해석했다는 오해를 산 것일까?

 대승불교는 많은 부분에서 긍정적인 작용을 하였지만, 대중을 설득하고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언어적 장치가 필요하였다. 이는 기독교 역시 마찬가지이다. 기독교 역시 글조자도 모르는 대중들에게 진리를 이해시키기 위해 많은 서사적 장치를 추가한 것이다. 하지만 대중들은 이 '장치'들을 직설적으로 믿어버렸다. 심지어 이 장치들에 집착하여 본말전도가 되어버리는 상황까지 치닫는다.

 불교를 공부함에 있어 가장 유의하여야 하는 부분이 바로 이 '아무 것도 없다'는 공사상에 대한 삿된 견해이다. 불교를 공부하며 허망함을 느낀다면 이는 매우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모든 고통이 소멸된 상태, 그 여여한 침묵의 상태에서부터 행복한 삶을, 깨어있는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 진정한 불교의 메세지이다.


전생과 윤회는 우리에게 있어 꽤나 흥미가 가는 이야기거리이다. 우리는 왜 전생이나 윤회에 흥미를 느끼는 것일까? 일단 전생이라는 것은 꽤나 낭만적이다. 전생은 내 안에 나도 모르는 과거와 어떠한 삶의 발자취가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매우 낭만적이며, '나 조차도 모르는 또 다른 나' 를 만나게 해주는 신비로운 창구가 되기도 한다.
 전생이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서 전생이 심리적으로 자신의 내면에 존재한 또 다른 자아를 탐색하기 위한 도구가 되기도한다. 이는 마치 타로카드와 같다. 타로카드처럼 우연에 의해 생성된 어떠한 이미지를 패로 두고 이를 거울삼아 사실은 나의 내면을 탐색하는 것이다. 이는 심리적인 치유의 한 방법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전생체험을 유도하는 최면술사나 심리상담가가 상담자를 최면상태에 빠져들게 하여 그의 무의식에서 나오는 이미지나 언어를 포착한다. 또한 심지어는 상담가가 전생을 리딩한다하며, 상담자를 보고는 전생을 술술 말해주기까지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생이 존재하느냐가 아니다. 그 떠오르는 이미지가 진짜 전생이느냐가 아니다. 그저 어떤 이유로든 포착된 무의식 속의 이미지를 거울삼아 사실은 상담자의 내면을 관찰하는 거울 같은 도구로 삼는 것이다. 어디로가든 종착역에 도착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상담자의 내면에 있는 어떠한 문제점을 끄집어내어 그것을 해소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전생과 윤회는 또한 현재의 부조리를 설명하는 수단이 된다. 많은 종교에서는 어떠한 이상향을 제시한다. 하지만 그 이상향에 비해 현실은 매우 불평등하고 참혹하다. 누구든 삶에서 자신이 처한 고난과 불공정함에 대한 설명을 원한다. 그럴때 사용하는 도구가 바로 '전생의 업보'인 것이다. '현재 나의 모습은 전생으로부터 이어져온 인연법에 의해 갖춰진 것이고, 앞으로의 모습은 현재가 지어간다.'는 강력한 논리는 과학적이냐를 떠나서 굉장히 힘있는 설득력을 갖추기 마련이다. 적어도 현재 나의 모습에 대한 부조리를 해소하지는 못해도 앞으로 내가 살아갈 삶은 현재 나의 모습이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생이나 윤회는 명상과 수행에 입문하는 초보수련자들을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 이에 너무 집착할 필요는 없다. 사실 '참나'의 시각에서 볼때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영원불멸성의 참나의 시각에서 시간성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시간의 흐름이란 유한한 존재가 생멸의 과정에서 느끼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절대자에게 시간성은 필요없다.
 명상의 깊은 상태에서는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수히 이어지는 현재만 있을 뿐이다. 무수히 이어지는 현재에 육신과 같이 별리의 상태가 찾아온다면 시간성이 부여되는 것이다. 하지만 '참나'는 시간성이 부여되지 않느다. 영원한 현재만 있을 뿐이다.
 그렇게 때문에 진정한 수행자라면 전생체험이나 이러한 것들에 집착할 이유가 없다. 다만 현재의 참나에 등불을 밝혀라! 오직 이것만 있을 뿐이다. 현재의 참나에 등불을 밝히는 것이 과거와 미래를 모두 밝히는 것이다. 오로지 현재를 밝힘으로써 과거의 업보도, 미래의 그늘도 걷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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